사그마이스터_3.세미나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의 일상과 작업, 디자인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인터뷰를 시작으로 그의 대표작들과 국내에서 진행된 사그마이스터 강연 내용을 정리해 3회에 걸쳐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진 사그마이스터 특강 내용을 요약해 재구성했다.
취재. 윤유성 기자 outroom@fontclub.co.kr
자료 협조. AMHERST, Sagmeister & Walsh
안녕하세요.
저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입니다. Sagmeister & Walsh(www.sagmeisterwalsh.com)라는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는 디자이너입니다. 저는 요즘 영화를 찍고 있는데요. <The Happy Film>이라는 제목의 ‘행복’에 관한 영화입니다. 제가 직접 출연하고 제가 찍고 있죠. (웃음) 오늘 내용도 ‘행복’이라는 커다란 흐름 안에서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제가 진행한 작업을 몇 가지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제가 어떤 생각과 태도로 얼마나 즐겁게 작업하고 있는지 짐작해볼 수 있을 거에요.
BMW 컬처 북(BMW Culture Book)
BMW 그룹과 함께 2011년 문화 공헌 활동 40주년을 맞아 제작한 컬처 북입니다. 이 책은 보통 책처럼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격 조종장치가 내장되어 리모컨으로 조종이 가능합니다. 한정판으로 제작된 총 1,488권의 책에 제가 직접 서명까지 했죠. 하지만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각기 다른 모양의 표지가 인쇄된 1,488권을 하나로 모으면 독일 뮌헨에 있는 BMW 본사 건물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펼쳐집니다.
“지금 여기에” 커피 테이블(“Be Here Now” Coffee Table)
저는 친구들과 소파에 둘러앉아 한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좋아하는데요. ‘지금 여기에 테이블’은 300개나 넘는 나침반을 이용해 그 기분을 시각화한 작품입니다. 자석이 부착된 에스프레소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면 유리판 아래 있는 나침반이 반응합니다. 잔이 놓이는 위치에 따라 마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 다니는 것처럼 나침반의 바늘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죠. 재미있지 않나요?
지금 여러분 기분은 어떤가요? 행복한가요? 저는 가끔 제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는지 생각해보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저는 어느 정도 가능하더군요. 물론, 오랜 시간 훈련을 통해 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묻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행복한가요? 가늠하기 어려우실 것 같아 여기 0에서 10까지 행복도를 구분한 그림을 준비했습니다. 0단계는 I am bad, 2단계는 I am pretty bad, 4단계는 I am bored, 6단계는 Things are OK, 8단계는 I feel good, 10단계는 I love life로 행복도를 구분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쯤 있나요?
강연 중인 사그마이스터
아시겠지만, 행복을 주제로 한 설문조사는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굉장히 많죠. 그 중에 몇몇 자료를 살펴보니 안타깝게도 한국은 그리 행복하지 않더군요. 중간 정도 수준입니다. 다행히 일본보다는 높습니다. 일본은 굉장히 불안한 것 같더군요. 여러분은 ‘행복’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나요? 아마도 편안함, 오르가즘, 환희 등 사람들마다 다양한 단어와 느낌을 떠올릴 겁니다. 하지만 ‘불행’에 대해서는 대부분 비슷하게 생각하죠. 억압, 불평등, 범죄 등의 피해자가 되면 모두들 입을 모아 행복하지 않고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하버드대의 한 교수님이 주목할만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셨습니다. 지난 2000년간 범죄가 크게 줄었다는 내용입니다.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한국전쟁 등을 겪었지만, 지난 1세기가 그 전 세기들보다 범죄가 적었다는 것이죠.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저는 문명이 좋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제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셈이죠. 말 그대로 ‘Now is better’입니다. 각설탕으로 컴퓨터그래픽 효과 없이 작업한 <NOW IS BETTER>는 그런 제 생각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Now is better 중 일부
저는 앞서 말씀 드린 영화 <The Happy Film>을 준비하면서 심리학 서적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그 중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 교수님 책도 읽었는데요. 그 분은 책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행복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해주셨습니다. 명상, 마약, 인지치료 등의 방법이 바로 그것들이죠. 저는 세 가지 모두 해보았습니다. 물론, 지금 마약은 하지 않습니다. (웃음) 여러분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보셨나요? 저는 위 세 가지 외에 한 가지 더 해보았습니다. 바로 ‘안식년’입니다.
문명 사회를 살펴보면 동서고금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비슷합니다. 25년간 배우고, 40년간 일합니다. 그리고 직장에서 은퇴해 15년간 여생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죠. (통계적으로) 여성은 2년 더 살 수도 있겠네요. (웃음) 그래서 저는 은퇴한 기간에서 5년을 미리 빼내 일하는 기간 안에 넣기로 했습니다. 은퇴하고 뒤늦게 누릴 여유와 행복을 미리 경험하는 것이죠. 제가 7년에 1년씩 안식년을 갖게 된 이유입니다. 이렇게 하면 은퇴 후 생활을 더 잘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죠. 그뿐 아니라 안식년 동안 해온 일들이 사회에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Bali Dogs
제 두 번째 안식년은 발리에서 보냈습니다. 안식년 기간에는 연락해야 할 클라이언트도 없고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마감일도 없죠. 온전히 제가 원하는 것을 모두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발리에 있을 때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발리 스튜디오가 들개들로 둘러 쌓여 있다는 점이었죠 그래서 저는 99마리 들개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작업을 했습니다. 각각의 들개를 티셔츠에 프린트해 99장의 티셔츠를 만들었죠. 티셔츠 뒷면에는 “So many dogs, few recipes”라는 무서운 글귀도 넣었습니다. (웃음)
수다쟁이 의자(Talkative Chair)도 그런 과정에서 탄생했습니다. 글귀가 새겨진 이 의자는 발리에서 안식년을 보냈던 2008년에 구상한 디자인입니다. 의자에 써 있는 텍스트는 발리의 한 베란다에 앉아 썼던 일기에서 발췌한 문장들이죠. 의자 제작은 야자수 가구 제작으로 유명한 발리 라탄(Bali Rattan)에서 해주었습니다. 의자에 써 있는 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때 썼던 글입니다.
수다쟁이 의자(Talkative Chair)
I very much love sitting here looking out over the Sayan Ridge
with a large pot of coffee and a medium size cigar and letting my mind go.
Life is still good. Just saw a spectacular sunrise
and now the incredible lush greens of the rice paddies pop my eyes out.
My big toe appears to be very dirty.
But it’s just a bit of congealed blood underneath my skin,
acquired during a morning walk through the jungle with John.
The small mosquitoes are a pain, so tiny they are basically invisible.
Their bites itch for days even without scratching.
Stop sitting here staring into the air.
Better get going! Take a shower and start the day proper,
there certainly is enough to do here,
I have already a whole list ready to go.
이처럼 저는 목적이 없을 때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즐기면서 작업하게 됩니다. 아이폰에 좋아하는 음악을 넣고 헬멧이 필요 없는 한적한 도로를 스쿠터에 올라타 목적 없이 질주할 때 느껴지는 짜릿한 전율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저는 안식년을 통해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재무적으로도 도움이 된다는 점이에요. 클라이언트 요구와 시간에 쫓겨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면서 더 좋은 반응을 얻고, 결국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는 것이죠.
동료 디자이너와 후배 디자이너를 보면 어떻게 하면 행복한 디자이너의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가장 쉬운 대답은 “하고 싶은 것들을 많이 하고, 하기 싫은 일은 덜 하라”는 것입니다.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덟 가지 항목의 원칙을 만들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첫 번째 항목은 앞서 이야기한 안식년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마감이라는 압박에서 벗어나 아이디어와 콘텐츠에 대해 온전히 자유롭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그 다음은 새로운 공간, 새로운 장소로 떠날 것을 권합니다. 이번에 서울을 방문하게 된 것도 제겐 여행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는 새로운 호텔, 새로운 공간, 새로운 환경에서 일이 더 잘 풀립니다. 운이 좋게도 제 전시는 스위스에서도 열리고, 이번에 서울을 비롯해 프랑스 파리,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서 갖게 됩니다. 상당히 즐거운 여행의 연속이죠.
• Thinking about ideas and content freely – with the deadline far away.
• Traveling to new places.
• Using a wide variety of tools and techniques.
• Working on projects that matter to me.
• Having things come back from the printer done well.
• Getting feedback from people who see our work.
• Designing a project that feels partly brand new and partly familiar.
• Working without interruption on a single project.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며 일하는 것만큼 지루한 일이 또 있을까요? 의도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작업해 보세요. 제가 진행했던 리바이스 청바지 포스터 작업이 한 사례가 되겠네요. 아시겠지만, 저는 청바지를 사와 한 올 한 올 모두 분해해 포토샵으로는 만들 수 없는 작업을 완성했었죠. 그리고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을 섞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새것만을 추구하면 불안해질 수 있고 오래된 것만을 고수하면 지루하게 보일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두 요소를 적절하게 섞는 게 중요합니다.
스탠다드 차타드 광고(Standard Chartered Commercial)
영국계 은행 스탠다드 차타드 광고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이 광고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에 방영할 네 가지 형식의 TV 광고를 계획해 제작한 것입니다. 세계 각지에서 온 네 명의 예술가가 제작에 참여했고 세계시장 진출, SC금융의 역사, 지속적인 변화, 인류에 대한 사랑 등의 네 가지 주제를 담아냈습니다. 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 각지에서 촬영한 그들 고유의 전통적인 문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저만의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덧입혀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일부 장면은 한국에서 촬영하기도 했죠.
카사 다 무시카 아이덴티티 작업(Casa da Musica Identity)
더불어 강조하고 싶은 건,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어야 더 행복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대표적으로 카사 다 무시카 아이덴티티 작업을 그렇게 진행했습니다. 포르투갈의 포르토(Porto)에 렘 콜하스가 설계한 콘서트홀 ‘카사 다 무시카’의 아이덴티티 작업이었죠. 이 콘서트홀은 독특하고 감각적인 외관으로 큰 명성을 얻고 있는데요. 저는 건물 형태를 특성화하지 않고 로고를 디자인하려 했지만 결국 치열한 연구 끝에 건물 자체를 로고로 탄생시켰습니다.
건물을 단 하나의 로고 형태로 제한하지 않고, 적용되는 곳에 따라 쉽게 알아볼 수 있으면서도 독특하고 현대적인 이미지의 로고가 카멜레온처럼 변환되는 시스템을 개발했습니다. 건물 외관을 투시도법에 따른 다차원적 다면체를 이용해 시각적으로 상징화하고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도 로고의 정체성은 유지되도록 했습니다. 로고는 카사 다 무시카에서 연주되는 다양한 음악을 표현합니다. 마치 주사위를 던질 때처럼 콘서트홀을 가득 채운 음악에 맞춰 그 특색이 변하는 다양한 관점과 양상을 보여주죠.
EDP 아이덴티티 작업
포르투갈 국영 전력회사인 ‘Energias de Portugal(EDP)’의 자회사에 제안한 브랜드 아이덴티티 작업도 유사합니다. 새로운 EDP 아이덴티티는 네 가지 기본 도형인 원, 반원, 사각, 세모를 사용했습니다. 주문에 따라 변형할 수 있는 모듈식 아이덴티티는 네 가지 도형을 이용해 무려 85개의 독특한 EDP 로고 마크를 생성할 수 있죠. EDP 브랜드가 성장함에 따라 함께 발전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EDP 아이덴티티를 제시하는 이 도형들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을 바탕에 둔 EDP의 사명을 대중에게 전하고 EDP의 다양한 사업 분야를 보여줍니다.
앞서 소개한 여덟 가지 항목을 모두 충족할 수 있다면 디자이너는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현재 관점을 기준으로 현재 처한 상황과 결과를 판단한다는 점입니다. 배고플 때 마트에 가게 되면 필요 이상으로 쇼핑하게 되는 것과 같죠.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기본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상황을 파악하기 때문에 그 이상을 보지 못합니다. 카드마술도 비슷한 맥락에서 여러분을 착각하게 만듭니다. 마술사는 여러분이 고른 모든 카드를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본 카드만을 보기 때문에 다른 카드를 바꿔치기 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만 바꿔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만의 방식으로 어떻게 그 행복을 더 크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세요.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