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는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_하라 켄야

 

<디자인의 디자인>, <白> 등의 저서와 무인양품(MUJI) 아트 디렉터로 잘 알려진 일본의 대표적인 그래픽디자이너 하라 켄야(Hara Kenya)가 한국을 다녀갔다. 2013년 서울에서 펼쳐질 <타이포잔치 : 서울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에 앞서 <타이포잔치 사이사이> 사전행사를 통해 대중강연회가 진행된 것. 그 중 하라 켄야의 강연 내용을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해 소개한다.

취재 및 정리. 윤유성 기자 outroom@fontclub.co.kr
이미지 제공. HARA DESIGN INSTITUTE (www.ndc.co.jp/hara)

최근에 진행 중인 작업부터 소개해주세요.

오랫동안 존경해온 안상수 선생님 도움으로 한국 디자이너 여러분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선, 최근에 관여하고 있는 <Architecture for Dogs>(http://architecturefordogs.com)라는 개(dog)를 위한 건축 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저를 포함해 시게루 반, 카즈요 세지마, 켄고 쿠마 등 일본 건축가와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참여해 진행되고 있는데요.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개집’을 만드는 작업이 아닙니다. 잘 아시다시피 개는 야생 늑대에서 오랜 시간 진화를 거듭해 인간과 함께 생활하며, 우리 곁에 남게 된 친숙한 동물 중 하나입니다. 인간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대하는 개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겠죠. 이제 와서 야생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고요.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 인간의 시선과 스케일로 개들이 생활하고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어왔다는 점입니다.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동물에 맞는 스케일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죠. 저는 인간의 스케일에서 벗어나 개를 위한 스케일에 집중했습니다. 인간 스케일에서 개를 위한 스케일로 기존의 동물 가구와 의류 디자인 등을 바꿔나가면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지금보다 더 좋게 변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개는 전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동물이기 때문에 개를 위한 건축 아이디어는 세계적으로 퍼져나갈 수도 있겠죠. 올해 12월에 마이에미에서 처음 오픈하고 2013년 가을에는 도쿄에서 공개될 예정입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가능하겠죠.

<Architecture for Dogs>

<白>, <디자인의 디자인> 등의 저서를 통해 선생님의 디자인 철학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간단하게 설명 부탁 드립니다.

저와 제 팀이 작업해온 디자인을 보면 아시겠지만 대체로 미니멀(minimal) 합니다. 북디자인을 할 때도 마찬가지인데요. 저는 지금도 그리드 시스템(Grid System)을 활용합니다. 저 같은 디자이너에게 그리드 시스템은 굉장히 유용한 도구 중 하나입니다. 1920년대에 처음 도입된 그리드 시스템에 고마워하고 있죠. (웃음) 특히나 일본어와 중국어, 영어와 한글 등이 함께 들어가야 하는 디자인에서는 그리드가 그 기능을 잘 해냅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어떤 컨텐츠를 보여주고자 할 때 글자는 ‘공기’처럼 사라져버리는 게 좋다는 생각으로 작업합니다. 북디자인이든 술 패키지든 디자인에 들어가는 글자는 언제나 최소한으로, 반면에 의미는 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하죠 ‘심플(simple)’이 아니라 ‘텅빈(empty)’ 느낌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메시지를 강하게 던지지 않고 상대가 그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텅 빈 그릇을 만들어 그들과 커뮤니케이션 해나가는 방식이죠. 

2011년 일본에서 발생한 대지진과 원전사고 데이터를 그래프로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정한 디자인 기준은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 연출하지 않는다. 둘째, 주장하지 않는다. 셋째, 누구든 알아보기 쉽게 표현한다. 넷째, 가능한 정확하게 디자인한다. 과장된 표현은 지양하고 311 때 어떤 일이 어떻게 얼마나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러자 의도하지 않았던 아름다움이 표출되었죠. 이 기준들은 제가 생각하는 타이포그래피와 맥락이 같습니다. 제 디자인의 기축이 되는 지점이죠. 디자이너는 타이포그래피를 위한 타이포그래피를 해서는 안됩니다.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이 보더라도 글자들은 디자인에 공기처럼 녹아 들어 있어야 하고, 의식되거나 거슬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때 타이포그래피의 큰 힘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술 패키지 디자인과 북디자인 작업

311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데이터를 정리한 디자인 작업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타이포그래피와 관련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랜 시간 무인양품 아트디렉터로 활동했습니다. 쓸데없는 것들은 과감하게 버리며 디자인했습니다. 디자인 의도, 디자인 하려는 디자이너의 기분을 들키는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디자이너의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유행이나 트렌드에 의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죠. 무인양품과 작업할 때에도 가능한 유행에 편승하지 않으면서 디자인 의도가 보이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중립적으로 글자를 사용했고 공기처럼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느낌으로 타이포그래피를 적용했죠. 가능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디자인이 없는 것, 디자인 의도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 무인양품은 그런 작업 중 하나입니다.

하라켄야가 아트디렉터로 참여한 무인양품 브랜드

제 작업들에 글자가 어떻게 들어가고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면 앞서 이야기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먼저, 츠타야 서점(Tsutaya Books)의 로고 디자인입니다. 츠타야 서점의 마케팅 타깃은 어린 아이보다는 성인들이기 때문에 튀는 디자인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느낌이 들도록 디자인했습니다. 방문객 중엔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도 많아 글자를 크게 키웠습니다. 대신 서점 안에서는 큰 글자가 필요 이상으로 공간을 차지할 수 있어 반투명으로 처리했습니다. 존재감은 있지만 방해되지 않도록 처리한 것이죠.

츠타야 서점(Tsutaya Books)

12년 전에 작업한 백화점 마츠야 긴자(Matsuya Ginza) 디자인도 비슷합니다. 제가 제안해 도트 패턴을 디자인 전반에 넣었습니다. 건물 외벽, 백화점 멤버십 카드, 포장지, 종이백 등에 모두 동일한 패턴을 넣고 그 특징을 살려 건축물과 타이포그래피를 연결했습니다. 그래픽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 건출물이 모두 하나의 패턴으로 일체가 되도록 했습니다.

Matsuya Ginza

글자디자인에도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글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가로와 세로가 균일하고, 두께 차이가 거의 없는 명조체와 고딕체의 중간 느낌을 살릴 생각입니다. 특징 없는 것이 특징이 되는 글자를 만들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제 작업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불필요한 요소는 최대한 제거하고 글자만 들어간 경우가 많습니다. 제 디자인을 알기 쉽게 만들기 위해서는 제 글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일본어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비롯해 한자와 영문, 숫자를 모두 포함하고 있죠. 타이포그래피 작업에는 다소 어려운 구조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마이너스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해소해나갈 때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언어적으로 어려운 환경이라 아시아 공동폰트라는 발상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우선, 일본어와 한자를 만들고 있는데 가능하면 동일한 컨셉으로 한글과 영문도 만들고 싶습니다. 일본에 머무르지 않고 아시아를 상대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어와 중국어, 한글이 모두 통일된 서체로 디자인이 이루어지면 그 효과가 배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관련된 디자인 작업에서는 앞선 프로젝트들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나요?

앞에서 말씀 드린 ’empty’에 이어 밀도, 즉 ‘density’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중국은 일본과 달리 밀도가 느껴지는 곳입니다. 제가 지금까지는 주로 비우는 작업을 해왔다면, 중국과 관련된 프로젝트에서는 채우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2008 북경올림픽> 지면 공모전을 위해 작업한 디자인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중국의 상형문자를 기본으로 픽토그램을 만들었죠. 픽토그램이 조밀하고 밀도 있게 모이면 마크가 됩니다. 그림 글자가 원 안에 모인 것이죠. 도장이 되기도 하고 티켓이나 포스터 사인 시스템으로도 전개가 가능합니다. 아쉽게 1등이 아니라 2등 수상에 그친 작업이었지만 중국이 갖는 고유의 밀도감을 느끼고 학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죠. 이때 본격적으로 중국 디자인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2008 베이징올림픽 디자인 공모 작품

두 번째 작업은 중국의 ‘경덕진(景德鎭)’이라는 마을을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중국 최대의 도자기 단지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12가지 동물을 넣어 전통 문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밀도가 느껴지는 문양을 디자인했습니다. 중국에서만 가능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에는 도형 문양이 있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글자와 관계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작업은 중국 천안문 광장 근처에 있는 ‘대책란(大柵欄)’을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중국의 전통미가 남아있는 작은 마을을 위한 작업인데요. 중국의 옛 거리가 그대로 보존된 곳입니다. 약 1.5km 주면 마을 곳곳을 3차원 데이터로 만들어 마을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만들고 그 이미지를 바탕으로 마을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했습니다. (앱 다운로드 http://bit.ly/118OJNo

‘중국’하면 떠오르는 낡은 종이에 접목해 중국적인 느낌을 살리고, 아무리 파고 들어가도 끝없이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조밀하게 넣었죠. 3차원 지도를 2차원 지도로 만들고 그 지도 이미지를 기반으로 손수건, 티셔츠, 쇼핑 봉투 등을 제작해 관광 상품으로 활용합니다. 함께 개발된 애플리케이션은 관광객들이 스마트 기기를 이용해 대책란 거리 정보를 손쉽게 확인하도록 도와줍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대책란 거리가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고층 건물을 올리려는 개발 사업으로부터 마을이 보호받을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경덕진(景德鎭) 문양 디자인(왼쪽), 대책란(大柵欄) 3차원 지도 중 일부(오른쪽)

스마트폰에서 사용 가능한 대책란(大柵欄) 3차원 지도 애플리케이션
3차원 지도에서 파생된 손수건과 컵 받침 등의 관광 상품

최근에 중국과 관련된 작업들이 늘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일본 내에서만 안주하지 말고 한국이나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제 디자인을 아시아 전체로 확대해 소개하고 싶은 바람이죠. 앞서 소개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밀도’라는 키워드로 중국 디자인의 특성과 정체성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상업적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하라디자인연구소(HARA DESIGN INSTITUTE)만의 디자인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중국에서도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최근 중국에서 규모 있는 디자인 전람회를 개최하고 있기도 합니다. 베이징, 상하이 등 세 군데 대도시에서 디자인 전람회가 진행되었죠. 제 전시에도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셨는데요. 앞으로 이분들과도 좋은 교류를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인간과 디자인의 관계를 생각하고 여러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작업합니다. 처음부터 아이디어가 샘솟는 건 아닙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해가는 과정에서 점점 발전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서 소개한 중국 대책란 프로젝트도 처음엔 3차원 지도를 만들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입체 지도를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면 그 마을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으리란 단순한 생각으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진행 과정에서 그것만으로는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더 분석하고 공을 들여 3차원 데이터로 지도를 만들어 발전시키게 된 것이죠.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은 상황이라 또 어떻게 발전될지 알 수 없습니다. (웃음) 여러분 반응에 따라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기도 합니다. 하나의 디자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반응을 보고 다시 아이디어를 보태 발전시키는 방식이죠. 디자인하고 관찰하고 또 디자인합니다. 개를 위한 건축도 비슷합니다. ‘개’와 ‘건축’이라는 키워드는 정해져 있지만 그 안에 무엇을 넣을 지가 문제겠죠. 이 또한 우선 던져놓고 시작해보는 겁니다. 웹에서 시작하지만 다른 매체로 전이될 수도 있고 개와 애견인, 건축 애호가들이 결합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갈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향후 계획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집(house)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내년 3월, <하우스비전>(http://house-vision.jp)이라는 전람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주택에 대한 전람회죠. 큰 관점에서 바라보면 집은 새로운 산업의 교차점입니다. 집의 형태와 기능은 얼마든지 발전 가능합니다. 몸은 맥박, 혈압, 체중, 체온 등과 같은 다양한 정보 덩어리이기 때문에 집은 거주자의 신체 정보를 읽고 반응할 수 있는 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식탁에 앉는 순간, 신체정보를 통해 누구인지 확인하고, 집주인의 현재 몸 상태를 파악할 수도 있겠죠. 집은 우리 인체와의 중요한 접점이라는 점에서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과제 중 하나입니다. 

디자인 영역이 재미있어지기 위해서는 산업이 재미있어야 합니다. 재미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경기가 좋으면 디자인은 멋있는 척만 하면 되지만, 경기가 좋지 않을 땐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고 새로운 산업의 가능성을 가시화해야 합니다. 이런 건 어떤지, 이렇게 하면 어떠한지 구체적인 형태로 제시하는 것도 디자이너의 역할입니다. 새로운 산업의 가능성을 ‘가시화(visualizing)’ 하는 것이죠. <하우스 비전>도 그런 맥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공유 가능한 내용입니다. 함께 생각하며 발전시켜가면 좋겠습니다. 3월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우스비전(http://house-vision.jp) 사이트와 기자회견 현장

072115_0631_1.jpg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