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가 그려내는 풍경_북디자이너, 정재완



최근 대형서점에 가보면, 표지만 보고도 사고 싶은 욕구가 생길 정도로 매혹적인 디자인을 가진 책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을 얼마나 멋드러지게 표현하느냐 역시 좋은 책의 필수요건이 되어가고 있다는 반증으로 그만큼 북디자인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북디자인이 책의 겉모양을 그럴 듯하게 꾸미는 것으로 쉽게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책의 첫인상을 좋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책의 본질을 이해하고, 좋은 내용을 가치 있게 완성하는 작업이야말로 진짜 북디자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폰트클럽에서 만난 사람은 바로 책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정병규출판디자인과 민음사출판그룹 사이언스북스를 거쳐 현재 영남대 디자인미술대학에 출강 중인 북디자이너 정재완. 그림을 다루는 일을 하고 싶어 이 일을 시작했다는 그는 스스로 상업적 북디자이너면서 동시에 실험적 글자작업을 하는 작가라고 소개한다. 정재완이 말하는 북디자인과 글자, 그리고 글자가 그려내는 풍경. 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어 보자.

취재. 길영화 기자(barry@fontclub.co.kr) 사진제공. 정재완






북디자이너가 된 계기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

두 명의 선생님이 계십니다. 일러스트레이터 이성표, 디자이너 정병규입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이성표 성님께 ‘그림으로 돈 버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상담을 드린 적이 있었죠. 그때 들은 대답이 ‘그림을 직접 그리는 것도 좋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림을 다루다 보면, 자기 그림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그림을 다루는 사람이 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후 정병규출판디자인에 취직해서 정병규 선생님에게는 ‘그림 다루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죠. 정병규 선생님은 2개월 된 신입사원인 저에게 일러스트레이터와 협업할 수 있는 재미난 일을 맡겨주었고,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함께 작업했던 출판사 편집자와 일러스트레이터들도 저처럼 초보였기 때문에 실수는 많았지만 그만큼 더 배울 수 있었고, 저돌적으로 작업했던 것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북디자인의 디자인 프로세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 부탁 드립니다. 

일반적인 과정을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편집자에서 작업 의뢰, 원고 받기 → 원고 읽고 검토하기 → 전체적인 계획 상의 (외주 디자이너/일러스트레이터/사진가) → 러프 스케치 → 본문 디자인 시안 및 결정 → 본문 디자인 진행(아트워크 담당자) → 표지 디자인 시안 및 결정 → 표지 디자인 완성 및 인쇄 교정 → 제작(인쇄 감리) → 홍보(온/오프라인 홍보물 제작)

그러나 어떤 부분에선 순서가 뒤바뀌기도 하고, 생략되기도 합니다. 외주 디자이너는 디자인 결과물이 나오면 그 임무가 마무리 되곤 해서, 홍보 부분에서는 조금 자유롭죠. 회사 내부에 있는 디자이너라면 책이 나오고 난 뒤에도 많은 일이 뒤따릅니다. 민음사에서 북디자이너로 있을 때도 그랬죠.



하나의 책이 출판되기 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함을 알 수 있었는데, 북디자인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당연히 밑그림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원고를 읽고, 어떤 책으로 만들지 여러가지 러프스케치를 하는데, 그 작업이 시간도 가장 많이 들고, 어렵습니다. 제 경우에는 막상 컴퓨터로 작업하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물론 마무리 단계에서는 시간이 좀 필요하죠. 시안이 결정되고 일이 진행되다 보면, 마무리 일정이 갑자기 다가올 때가 있는데, 그렇다고 급하게 마무리하면 완성도가 조금 떨어집니다. 처음 생각했던 것이 잘 반영되지 않는 것 같고… 그래서 마무리는 좀 천천히 해야 됩니다. 필름을 뽑기 전 가장 마지막 작업도 완성도를 위해서 중요한 단계인 것 같네요. 결국, 처음과 끝이 가장 중요하다는 참 평범한 말이 되어버렸네요. 그렇지만 평범한 것, 뻔한 것이 제가 보기엔 값어치가 있는 일입니다. 특히 책은 더욱 그런 것 같아요.



북디자인에서 글꼴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커버와 본문 디자인에서 글꼴을 선택하는 기준이나 과정이 있다면? 

본문 디자인에서 글꼴을 선택하는 기준은 한 가지,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하게 잘 읽히는 글꼴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디자인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다 보니 변화를 많이 주기 보다는 특정한 서체를 자주 사용하게 됩니다. 오래 사용하다 보면 여러 가지 조절에도 자신감이 생기고요. 최근에는 이례적으로 류양희 씨의 ‘고운한글바탕’을 본문에 사용했습니다. 글꼴이 주는 인상이 편안하고 단정했기 때문에 잘 적용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고, 새로운 글꼴에 대한 실험을 해본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상업출판에서 실험이라는 것이 위험 부담이 있을 수 있겠으나, 글꼴 자체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진행했고, 결과도 나쁘진 않았어요.

▲ 류양희의 ‘고운한글’이 사용된 『보이지 않는 이야기』(봄나무)

자주 사용하시는 글꼴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sm 신신명조와 sm 견출고딕을 선호합니다. 자주 사용해서 다루는 데 자신감도 잇고, 가장 기본적인 글꼴이라서 어느 정도 안전함도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만족하는 작업이 어떤 것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3가지만 말씀해주신다면.

『서울, 북촌에서』, 『종교전쟁』, 『동적평형』입니다. 저는 상업출판사와 일하는 북 디자이너이면서, 거리 글자에 관심을 갖고 개인작업을 즐기기도 합니다. 쓸모 있는 일과 (쓸모 없는) 실험을 동시에 하고 있는 거죠. 그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쓸모만 생각하면 디자인이 얄팍해질까 걱정되고, 실험만 생각하면 디자인이 허망해질까 걱정됩니다. 그래서 개인 글자 작업과 상업 북디자인이 만나는 접점을 시도해보려고 하는데, 위 세가지 표지작업에서 어렵지만 그 흔적을 조금이라도 내볼 수 있었죠.

▲ 정재완 스스로 뽑은 베스트 웍스. 『서울, 북촌에서』(믿음인), 『종교전쟁』(사이언스북스), 『동적평형』(은행나무)

교수님의 개인전인 ‘글자풍경’을 보면 방금 말씀하신 거리 글자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가 있는데, ‘글자풍경’은 어떤 전시이고,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2000년부터 걸어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아무거나 마구 찍었어요. 패턴, 색, 사물, 사람 뒷모습 등등. 그 중에서 유난히 저를 사로잡은 것이 ‘글자’였어요. ‘슈-즈’ ‘고무인’ ‘오뎅’ ‘빵’ ‘이발’….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어딘가 어설프고, 촌스럽고, 즉흥적인 글자들. 동네마다 다른 글자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흥미로웠고, 지역마다, 혹은 도시와 시골의 풍경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글자를 보면 더 크게 느껴졌죠. 그러다가 대학원 프로젝트 졸업논문을 쓰게 되었는데, 그 주제를 ‘거리글자’로 잡았어요. 어느 순간 거리 글자가 저를 지배했으니 당연한 것이기도 했지만, 막상, 결과를 염두 해두고 모은 것도 아니고, 학술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뭘 어떻게 할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그때 논문에 대한 고민과 방황이 ‘글자작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안상수 선생님과 함께 하는 ‘가가학습’에서는 전시를 해야 졸업논문을 인정해주셨는데, 그것이 『가가전』이에요. 첫 개인 전시이고, 제목을 ‘글자풍경’으로 붙였어요. 글자가 놓여있는 풍경, 글자가 만든 풍경, 글자로 만든 풍경 등등을 생각하며 글자에 대한 제 생각을 풀어보는 자리였죠. 그 이후에도 ‘글자풍경’이라는 표현이 맘에 들어서 같은 제목으로 계속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다만, 글자에 대한 제 입장과 생각이 조금씩 살도 붙고, 가지도 치고, 분열도 해요. 여전히 진행중인 글자풍경인거죠. 그 동안 제가 글자를 모았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글자가 나를 불렀다’ ‘글자가 내게로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자가 우리의 손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제 우리를 호명하는 ‘능동적인’ 존재가 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글자풍경이 있거든요.

‘글자풍경’ 실험 작업이 상업적 북디자인 작업에 크게 영향을 미치나요? 둘 사이의 어떠한 연계성이 있을 것 같은데요.

글쎄요. 북디자인과 어떤 연계성이 있을지요. 실험과 상업(쓸모)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맞닥뜨리는 점을 찾아가는 것이 제 숙제이기도 합니다. 우선 글자풍경 작업은 글자를 대하는 제 태도와 생각에 많은 변화를 준다고 생각해요. 거리에서 보이는 게 글자, 책을 디자인하면서 다루는 게 글자니까요. 늘 글자를 머리 속에 생각해요. 책을 읽다가도 ‘거리’ ‘글자’ ‘풍경’ 이런 말만 나오면 유심히 보게 됩니다. 아무튼 글자에 지배당하고 살고 있으니, 제 북디자인 작업에서도 ‘글자’는 다른 무엇보다 좀 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또 거리 글자의 투박함이나 과감함을 느끼다 보면 글자를 좀 더 박력 있게 다루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서울 북촌에서』는 덕지덕지 붙은 테이프조각이, 『종교전쟁』에서는 앞다투어 튀어나오려는 광고문구가 그렇게 태어난 생각인 것 같네요. 그리고 언젠가부터 글자를 손으로 그리는 것도 재미있어요. 글자를 모으고, 그리고, 생각하는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제 작업에 연결된다는 생각하죠.

▲ 글자풍경 2010 전시회 ◀ 북아현동, 글자풍경 2007 출품작 ◀ 칠성시장 글자풍경, 글자풍경 2010 출품작 > ◀ 삼덕동, 글자풍경 2010 출품작 북디자이너로써 본인이 느끼는 책의 매력이라면 무엇일까요?

제인 구달 박사가 쓴 『희망의 밥상』을 디자인했는데, 이 책을 통해 제 삶의 방식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환경 오염 때문에 인간의 먹을 거리가 위기에 처해진 지금의 상황은 인간의 지나친 욕심과 이기적인 행동이 부른 결과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구달 박사는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실천하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통해 배움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놀랍고 고마운 일입니다. 퇴근길 사람 많은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을 뵌 적이 있는데, 마음이 찡해왔습니다. 책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것을 느꼈어요. 책은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이기 전에 책을 읽는 독자의 손 안에서 완성되는 어떤 인격체와 같다는 것을요. 디자이너 정병규 선생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책에는 책격이 있다.’

▲ 민음사 사이언스북스에서 출판한 제인 구달 박사의 저서들

현재 출판시장은 전자책, 태블릿 등으로 큰 변화가 예측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한 북 디자인의 전망과 지향점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

변화가 있겠죠. 상업 출판사들의 앓는 소리가 너무 부각되는 요즘입니다. 그런데 전 출판 ‘시장’은 잘 모르고, 그다지 관심도 없습니다. 매체가 달라져도 책이 가진 본질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죠. 종이 책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경제성, 편리성 등을 생각하면 전자책이 많은 역할을 할 테고, 종이책 세상에서는 오히려 이제 가짜들은 사라지도, 진짜만 남을 것 같아요. 종이가 가진 본질이 더 극대화되고, 책이 진짜 책다워질 수 있다고도 생각해요. 제 생각에는 더 즐거워질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지향점이기도 하고요. 진짜 책.

본인에게 영향을 주었다거나 특별히 선호하는 디자이너가 있나요?

많죠. 안상수, 정병규, 권혁수, 박상순, 이성표, 안지미, 이기준, 김형진, 유윤석, 전가경 등 너무 많아요. 각각 이유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삶의 태도, 디자이너로서의 태도, 작업에 대한 진지함, 깨어있는 사고, 관습을 거부하는 유희, 글쓰기에 대한 자극 등이에요. 또 한 분 『녹색평론』을 디자인하신 분인데, 누군지는 잘 몰라요. 군더더기 없고, 솔직 담백한 포맷 디자인에서 자극을 받았죠. 아무것도 안 한 디자인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봐버린 저를 불쌍하다고 토닥여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 1991년 창간된 격월간지 『녹색평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분열을 치유하고 공생적 문화가 유지될 수 있는 사회의 재건에 이바지하는 것을 주제로 한다.

홈페이지 www.jjwan.com 에서 흥미로운 드로잉들이 많이 있던데, 개인적인 작업들인가요?

짧은 글과 간단한 그림으로 제 마음의 그때 그때를 기록해두는 작업들입니다. 디자이너, 교육자로서의 삶이 논픽션이고 소설이라면 그것은 시 입니다. 또 하나는 글자 드로잉인데, 거리 글자를 연구하며 개인적인 작업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작업을 위한 스케치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 정재완의 홈페이지 www.jjwan.com에 올려진 드로잉 中

여담으로, 일을 하면서 재충전이 필요할 때 어떻게 하시나요?

가족과 함께 놀러 갑니다. 대구에 살고 있는데, 주변에 갈 곳이 많아요. 포항, 부산 바다가 가깝고, 경주, 안동도 가깝고, 창녕, 합천도 가까워요. 밀양도 좋고요. 여행을 좋아해서인지 주말에 많이 다니게 되죠. 또한 주 5일 근무를 최대한 지켜내려고 해요. 그래야 월요일이 새롭거든요.

마지막으로 북디자이너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선배로써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북디자이너가 유행이어서 하고 싶어하는 분들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유행은 지나가기 마련인데, 지금의 북디자인 유행 현상은 곧 끝날 것 같거든요. 전자책 나온다고 앓는 소리들도 많이 하잖아요. 썩 유망한 분야라고 말씀 드리긴 어려운 것 같아요. 하지만 북디자인은 유행과는 상관없이 좋은 일이에요. 그러니 꼭 하고 싶은 사람이 했으면 합니다. 그냥 책 표지를 내 포트폴리오에 넣고 싶은 거라면 북디자이너를 안 해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그 어떤 디자이너도 앞 표지 그럴싸하게 만드는 것은 할 수 있을 테니까. 북디자이너는 표지만 예쁘게 만드는 작업이 절대 아닙니다. 좀 더 책 안으로 들어가야죠. 그냥 삶이 그래야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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