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디자인 기행_강문식 디자이너

앞으로 폰트클럽을 통해 네덜란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예술, 문화 뉴스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래픽디자인을 중심으로 하되 영역을 한정하지 않고 그래픽 디자인을 아우르는 다방면의 문화 예술로 확장된 시각 뉴스를 구성할 예정이다. 먼저, 강문식 디자이너를 소개한다. 강문식 디자이너는 계원예술대학교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헤릿 리트벨트 아카데미(Gerrit Rietveld Academie)에서 공부했다. 2012년에는 <브르노 비엔날레(Brno Biennial)>에 참여한 바 있고, 올해 <타이포잔치 2013>에 참여해 새로운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를 만나 디자인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진행. 오경민 작가 min@min-oh.net

<How to make your life hard in one day>, 2011

오경민: 리트벨트 졸업 작품이자, 문식씨가 직접 운영하는 +082Press에서 출판된 <Unsigned Signs>부터 시작하죠. 다른 문화, 다른 세대, 다른 언어에서 오는 소통의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두 사람이 가진 공통 관심사, 글자(Letter)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어요. 암스테르담의 첫인상으로 책의 소개 글을 시작했는데요, 저와 비슷한 환경에서 참 다른 생각을 했다고 느꼈어요. 저는 디자이너의 손이 전혀 닿지 않은 것만 같은 암스테르담 거리의 간판들을 보며, 소문으로 듣던 훌륭한 더치 디자인(Dutch Design)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거든요. 문식씨는 저와는 다른 것에 주목했네요.

 
 

강문식: 말씀하신 대로 매체에서 봐 왔던 더치 디자인을 생활 속에서 보기는 힘들었어요. 오히려 자전거를 타고 매일 지나가는 운하의 다리에 새겨진 글자들이라던가 오래된 카페에 페인팅 된 레터링들이 제 삶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죠.

 
 

오경민: <Unsigned Signs>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강문식: 암스테르담의 거의 모든 간판 레터링 작업을 하신 할아버지, 레오 부커봄(Leo Beukeboom)에 관한 이야기에요. 단순히 레오와 그의 작업을 소개하고자 했다기보다는, 레오를 통해서 제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레오와 제가 어눌한 외국어(영어)를 보완하기 위해 손동작이나 그림, 그리고 불완전한 손글씨 등을 이용해서 어렵게 소통하는 그 상황이, 마치 네덜란드어를 읽지 못하기 때문에 패키지의 모양과 디자인을 이용하여 샴푸와 음료수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네덜란드에서 생존하고 있는 저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 미스커뮤니케이션(miscommunication)을 책에 담고 싶었어요. 당시 서양인의 시각으로 일본을 바라본 롤랑 바르트(Roland Gerard Barthes)의 <기호의 제국 (Empire of Signs)>을 읽으면서, 동양인의 시각으로 서구를 바라보는 반대의 상황을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책 구성은, 그의 레터링 작업 아카이브(archive) 뿐 아니라 오점투성이의 인터뷰, 그리고 레오와 저의 협동 작업, 이렇게 세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어요. 협동 작업은, 레오가 사고로 오른손을 다치면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마지막 레터링 작업을, 제가 직접 레오의 도구들을 이용해서 완성해 보는 것이었죠. 이 부분에서조차도 미스커뮤니케이션에 의한 실수가 있었어요. 그려야 할 글자들을 레오 할아버지가 왼손으로 구불구불하게 적어 주셨는데, 제가 그것을 잘못 읽는 바람에 최종 작업에 그 오자가 그대로 반영되었어요. 하지만 이런 실수도 프로젝트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수정하지 않았어요. 각 세 부분은 차례대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는, 서로 다른 층들이 한 책 안에 공존하는 구조를 하고 있어요. 페이지 구성에서도 미스커뮤니케이션을 반영하고 싶었거든요.

 

오경민: 레오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

 
 

강문식: 유지원 선생님 소개를 받았어요. ISTD TypoGraphic 67호 <I wonder> issue 에서 레오를 발견하시고, 레터링에 관심이 있는 저에게 정보를 주셨어요. 직접 만나보고 싶지만, 암스테르담에 갈 수가 없으니 현지에 있는 제가 직접 만나보길 권유하셨죠.

 
 

오경민: 올해 봄 암스테르담의 독일문화원에서 진행된 <암스테르담 독일문화원의 평양 ? 열람실 재개원> 전시에서, 사라 반 더 하이데(Sara van der Heide) 프로젝트를 위해 만들었던 레터링 작업도 <Unsigned Signs>가 연결고리가 된 건가요?

 
 

강문식: 네. 작년 여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 Brazil)에서, 리트벨트 아카데미 졸업반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함께 기획한 워크숍이 열렸어요. 1주일간 임시 학교를 여는 컨셉의 워크숍이었고, 각 학생이 자신의 워크숍을 직접 기획하고 운영했죠. 저는 물론 레터링에 관한 워크숍을 진행했고요. 리트벨트 아카데미 선생님인 사라가 그 워크숍을 보셨고, 레터링이 필요한 본인의 프로젝트를 위해 기술적인 도움을 요청했어요. 독일문화원 전시에서는 레터링 작업 이외에도, 당시 전시에 들어가는 전체적인 디자인 작업을 다니엘 노레가드(Daniel Nørregaard)와의 협업으로 진행했어요.

<암스테르담 독일문화원의 평양 – 열람실 재개원>, 2013 독일문화원 암스테르담 레터링 
컨셉: 사라 반 더 하이데(Sara van der Heide)
레터링 페인팅: 강문식 
사진: 요하네스 슈바르츠 (Johannes Schwartz)

<암스테르담 독일문화원의 평양 – 열람실 재개원> 프린트 디자인, 2013

다니엘 노레가드(Daniel Nørregaard)와의 협업

오경민: 최근 디자인한 <공포영화 서바이벌 핸드북> 표지 디자인이 인상적이었어요.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쉽게 쓸 생각을 하진 않을 것 같은 서체를 간결한 그래픽 어법과 조합하여 잘 풀어냈다고 생각해요. 사용한 글자 모양이 레오의 컬리 레터(curly letter)와 약간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레터링에 관한 관심이 연결됐다고 볼 수 있나요?

 
 

강문식: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접근은 약간 달랐어요. 기존에 많이 사용되는 서체들과는 차별화되는 서체를 찾고 싶었어요. 새로우면서도 책의 주제와 연결되는 모양새를 가진 서체들을 조사하다가 이 서체(물감체, 태시스템)를 발견하게 되었죠.

<공포영화 서바이벌 핸드북>, 프로파간다 출판, 2013

오경민: 작년 <브르노 비엔날레(Brno Biennial >에서 전시됐던 벨리고딕(Belly Gothic)도, 벨고딕(Bell Gothic)에 강문식씨 나름의 손맛을 가미한 것으로 보이던데요.

 
 

강문식: <공포영화 서바이벌 핸드북>은 서체 형태가 주는 느낌이 디자인의 중요한 부분이었다면, 벨리고딕은 시스템적인 문제를 건드린 것이었어요. 벨고딕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장점이자 특징인 잉크트랩이 인쇄기술의 발달로 그 의미가 퇴색되고 현재에는 스타일로만 남게 된 상황을 과장해서 표현한 서체였죠.

<Belly Gothic>, 2012

오경민: 각 프로젝트가 접근은 달랐지만, 비규범적, 비정형적 형태로 우연처럼 연결됐네요. 이번엔 학교 얘기를 해볼까요? 리트벨트 아카데미(Gerrit Rietveld Academie)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강문식: 한국 대학교와의 시스템적 차이가 가장 크게 다가왔어요. 교수, 조교, 학생 사이의 위계가 명확하게 구분된 조직이 아니라 각자의 역할을 따라 필요할 때 연결됐다가 해체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점 조직 같았어요. 그리고 모든 프로그램은 학생들이 공부하고 싶어하는 부분을 지원해 주기 위한 방향으로 디자인되어 있다는 느낌이었죠. 교육 내용에서도 지식 전달 위주가 아니라 주로 개념에 대해 접근했고, 필요한 지식은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채워 넣어야 했어요.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돼버렸지만, 처음 학교생활을 시작할 당시에는 굉장히 새롭게 느껴졌어요.

 
 

오경민: 2011년 프라하에서 진행된 리트벨트 학생 전시회 <Rietveld at Prague>를 위해 디자인한 포스터에서, 리트벨트 아카데미와 리트벨트가 디자인한 의자를 단도직입적으로 연결한 부분뿐 아니라, 저명한 디자이너의 고급 의자를 대중적으로 친숙한 광고 전단 형식과 결합한 부분이 재미있었는데요, 문득 2년 전 강문식씨와 한 대화를 떠오르게 하더군요. “디자이너 친구와 익명으로 ‘찌라시’ 디자인 회사를 만들기로 했다”고 농담처럼 말했었죠. 이 포스터는 그 야심을 실현해 본 건가요?

<Rietvelt at Prague>, 2011 
안근표와의 협업

강문식: 하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이 포스터는 리트벨트에서 같이 공부했던 안근표 형과의 공동 작업이었는데, 아이디어는 다큐멘터리 영화 <체코 드림(Czech Dream)>에서 얻었어요. 가짜 홍보 광고지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전시로 유도하는 것이었죠.

 
 

오경민: 네덜란드의 가구 디자인과 체코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리트벨트 아카데미와의 연결 고리로 삼은 것이군요. 문식씨의 디자인 작업 중 제가 유독 관심이 가는 작업들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하는데요, 고급과 저급,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기성의 것과 그에 대한 반격, 기계적인 것과 손맛의 ‘중간 지점’을 볼 수 있다고나 할까요?

 
 

강문식: 그렇게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작업 과정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조화로움이거든요. 한쪽으로 치우친 것보다는, 줄타기하는 느낌으로 불안한 듯 양쪽 다 놓치지 않는 균형감이요.

 
 

오경민: 마지막으로 현재 작업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강문식: <타이포잔치 2013> 프로그램 중 <무중력 글쓰기>에서 보여줄 작업을 진행 중이에요. 7명의 젊은 그래픽 디자이너와 7명의 젊은 시인이 1대1로 팀을 이루어, 시인은 시를 쓰고 디자이너는 움직이는 타이포그래피를 만드는 프로젝트에요. 서울 스퀘어 미디어 파사드에서 상영될 예정이고요. 고정된 지면 안에서만 작업하던 시인과 그래픽 디자이너가, 움직이는 영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생각해 보는 재미있는 실험이 될 것 같아요.

저는 서효인 시인과 짝을 이뤘어요. 초반 작업 당시 서효인 시인이 제가 사하라 사막 여행에서 막 돌아왔다는 얘기를 듣고는, 여행의 감회를 세 가지 단어, 즉 동사, 형용사, 명사 각 한 단어로 표현해 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리고 그 단어들을 모티브로 해서 <서울 사막>이라는 시가 만들어졌죠. 사람들이 거리를 걷다가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될 시를 만들고 또 보여주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 환경에 적합한 짧은 호흡으로 구성되었어요. 이 작업은 9월 24일에 상영됩니다.

<서울 사막>, 2013
단채널 비디오, <타이포잔치 2013> ‘무중력 글쓰기’ 프로그램을 위해 서울스퀘어 미디어 캔버스 상영용으로 제작 /영상보기 

인터뷰를 마친 후 그는, 3년여의 암스테르담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도시에서의 삶을 시작하기 위한 막바지 차비를 하러 떠났다.

<How to make your life hard in one day>,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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