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손글씨, 장영호 캘리그라퍼

 

텅 비어있던 무지 노트가 바로 눈 앞에서 화려하게 변신한다. 고민고민 하다 적어달라고 뱉어놓긴 했지만 확신이 가지 않던 문구가 그의 손끝에서 가장 화려하고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돌변한다. 말 그대로 일필휘지, 화룡점정. 이 지경, 혹은 이 경지에 오르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까? 빈 공간만 보면 글씨를 쓰고 싶어 손이 근질거린다는 장영호 작가를 만나고 왔다.

취재. 윤유성 기자 outroom@fontclub.co.kr 

안녕하세요. 장영호 작가님. 간단한 소개를 부탁 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저는 손글씨 쓰는 장영호라고 합니다. 꽤 오랜 기간 MF, MLB, EXR, POLHAM, 제일모직 등에서 VMD(Visual Merchandiser)로 일해왔는데요. 손글씨로 여러분들과 더 가까운 곳에서 호흡하고 싶어 거리로 나왔습니다. 노트에 손글씨를 써드리면서 여러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행복을 전해드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주로 강남역 근처 카페 거리와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손글씨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캘리그라피 작가들을 보면 서예, 붓글씨를 기본으로 하셨던 분들이 많은데 저는 펜글씨로 시작했어요.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보면 아버지께서 선물해 주신 알파벳 펜글씨 교본이 계기였던 것 같아요. 영어 시간에 저 혼자 필기체로 필기할 수 있을 정도로 글씨 연습을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납니다. 교회와 대학교 편집부에서도 계속 손글씨를 연습했고 친구들에게도 손글씨를 써주면서 캘리그라피에 대한 관심을 계속 이어왔죠.

장영호 작가는 다양한 브랜드의 런칭 행사에 참여해 캘리그라피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다수의 브랜드 로고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손글씨나 서예를 공부하신 건가요?
제 전공은 의상디자인이에요.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의상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죠. 좌절하면서 재수를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서점에 가서 패션과 관련된 직업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패션 사진가’라는 분야를 알게 되었죠. 필름카메라를 초등학교 때부터 들고 다녔기 때문에 저도 패션 사진가라면 재미있게 일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사진기 들고 컬렉션에 찾아 다녔죠. 수업보다 브랜드 모니터링을 했는데 학교보다 패션쇼에 가는 일이 더 많았어요. (웃음) 패션 브랜드 홍보담당자를 비롯해 패션 디자이너와 사진 기자분들이 참 많이 예뻐해 주셨죠. 그때도 ‘파워블로거’라는 개념이 있었다면 제 인생은 또 달라졌을 거에요.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필름카메라를 어릴 때부터 들고 다니셨다고요?
네. 니콘(Nikon) 카메라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니코매트(Nikomat)를 사용했어요. 아직 갖고 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들고 다니면서 필름으로 사진을 찍었어요. 한 손에는 보온 밥통, 다른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다녔죠. 친구들을 찍어주고 인화해 선물해주면서 사진에 재미를 붙였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다가 대학에 가서는 흑백사진연구회에 들어가 동아리 활동도 했죠. 필름 위에 제 손글씨를 쓰고 인화해 선물해주면 친구들이 굉장히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경필대회에 참가했던 어릴 적 장영호 작가의 손글씨와 다양한 물건 위에 써준 손글씨.

손글씨 노트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이렇게 거리로 나와 독립하기 전 3~4개월간 본의 아니게 두 가지 일을 병행했어요. 주중엔 VMD로, 주말에는 거리로 나와 노트에 손글씨를 써드렸죠. 그런데 아무래도 제가 더 좋아하는 일에 시간과 관심이 쏠리게 되더군요. 회사에서는 저를 믿고 일을 맡겨주셨는데 죄송한 마음도 들고, 일하기로 했던 계약기간도 끝나가는 시점에 노트와 필기구를 챙겨 들고 거리로 나와 팝업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어요. 페이스북(www.facebook.com/zhangyoungho)을 통해 입소문도 나고 다행히 많이 좋아해주셔서 즐겁게 작업하고 있습니다. 장마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조금 아쉽긴 해요. (웃음)

 
 

길 위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바로 그 자리에서 예상치 못하는 여러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에요. 처음엔 작더라도 공간을 빌려 프로젝트를 시작할까 고민도 했는데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지금처럼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길에 나와 있다 보니 사무실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만남이 다른 손글씨 작업으로 연결되기도 하고요. 노트를 받아 들고 좋아해주시고 누군가에게 선물해주려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 희열을 느껴요.

장영호 작가는 고객이 원하는 이름과 문구를 손글씨로 노트에 적어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반응이 굉장히 좋던데요. 이유가 뭘까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노트잖아요. 초기엔 A4 같은 종이에 이름 석자만 써드릴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렇게 써준 종이는 쉽게 버려지거나 어딘가에 묻히게 되잖아요. 그런데 노트 표지에 손글씨를 써드리면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도 있고, 노트를 쓰는 동안 손글씨를 계속 간직할 수 있죠. 그리고 예쁜 폰트들이 이미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그 폰트는 오직 ‘나’를 위한 글씨는 아니잖아요. 손글씨로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의 마음과 메시지를 그 자리에서 바로 써드릴 때 느껴지는 아날로그 감성이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품질 좋은 노트도 한 몫 하는 것 같습니다.

제 파트너가 되어주신 복면사과(www.banditapple.com) 김영조님의 노트에요. 우연히 너무 좋은 무지 노트를 발견하고 누가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지 알아봤는데 김영조님의 ‘복면사과’라는 브랜드 제품이었어요. 종이에 형광 처리를 하지 않아 일반 종이보다 빠르게 변색돼요.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색이 변하면서 더 매력적인 노트가 되죠. 노트에 손글씨를 써서 샘플로 보내드리고 제안을 했죠. 노트에 손글씨를 써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함께 하고 싶다고요. 다행히 며칠 후에 마켓을 진행하는데 같이 하자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때부터 복면사과 노트에도 손글씨를 써서 판매할 수 있게 되었죠. 저에겐 너무 좋은 캔버스에요.

 

손글씨 잘 쓸 수 있는 일곱 가지 팁

하나. S와 ㄹ을 공략하고 크게 쓰자
둘. 플러스팬을 눕혀서 써보자
셋. 형광팬에 검정 스탬프 잉크를 부어 써보자
넷. 손가락에 힘을 빼자
다섯. 비싼 팬 쓰지 말자
여섯. 복사지에 쓰지 말고 아트지에 쓰자
일곱. 글씨의 각을 맞추자

손에 힘을 주면 자유로운 워킹이 불가능합니다. 손글씨에서는 가장 기본입니다. 그리고 비싼 팬으로 쓰면 아까워서 연습할 때 마음껏 쓰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연습이 위축됩니다. 우선 저렴한 매직이나 플러스팬으로 마구 써보시고 비싼 팬은 나중에 선수가 되면 사용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복사지 말고 공연포스터나 전단 같은 종이에 쓰세요. 모조지 계열의 A4지는 종이흡수가 잘 됩니다. 그래서 잉크를 빨리 잡아먹죠. 아트지 계열의 전단지 등은 잉크 흡수가 더뎌서 팬과 종이 사이에 유막을 형성해 주기 때문에 마찰이 적습니다. 그만큼 휘리릭 빠르고 부드럽게 글씨를 쓸 수 있습니다. 물론, 글씨 성격에 따라 종이를 선택해 사용해야 하는 건 기본이겠죠.

일정하게 각을 맞춘 보라색 선에 주목하세요. 이처럼 일정한 각을 정해 글씨를 써보면 조금 더 깔끔하게 정리된 글씨를 쓸 수 있습니다.

손글씨 작업할 때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요?
일단, 망치지 말자. (웃음) 한 권에 몇 천원 하는 노트에 글씨를 쓰기 때문에 최대한 집중해서 글씨를 써야 해요. 고객이 써준 메시지를 어던 도구로 어떻게 쓸지 미리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이름은 틀리지 않았는지 확인하면서 신중하게 쓰는 것 외엔 크게 신경 쓰는 부분은 없어요. 기업에서 의뢰 받은 글씨도 거의 한 번에 써지는 경우가 많아요. 첫 번째 작업한 글씨가 대부분 가장 잘 쓴 글씨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노트에 손글씨를 써주는 작업이 가능한 것 같아요. 쓸수록 좋아지는 스타일이었다면 노트에 손글씨를 써주고 돈 벋는 일은 불가능했겠죠. (웃음)

 
 

주로 어떤 메시지를 적어 주시나요?
노트에 적어드리는 문구도 일부러 많이 준비하지 않아요. 메뉴판처럼 응원, 사랑, 남자친구에게, 여자친구에게 등등 주제별로 문구를 써놓으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고객들에게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리고 싶어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글귀를 노트에 적어드리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글귀를 정해두면 다른 팬시노트와 다를 게 없잖아요. 노트 앞에서 뭐라고 써달라고 할지 우물쭈물 거리다 포기하고 돌아가는 분들도 적지 않아요. 그런데 젊은이라면 머릿속에, 가슴 속에 담아놓은 삶의 목표나 좋아하는 구절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고래 한 마리요. 저도 고객분들이 적어주는 글귀를 보면서 많이 배운답니다.

버려진 종이컵들이 장영호 작가의 손글씨와 만나 다시 태어난다.

‘컵 캘리’ 작업도 소개해주세요.
어느 날 회의를 하다 지루해져서 바닥에 나뒹구는 종이컵에 글씨를 써봤어요. 컵 캘리는 그렇게 시작된 작업이에요. 그냥 버려지기 아까운 것들이라 쓰레기통을 뒤져 그 위에 글씨를 쓰고 사진을 찍었죠.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쓰는데 벌써 1년이 넘었네요. 버리지 않고 모아두고 있는데 나중에 책으로도 정리해보고 싶어요.

 
 

좋아하는 작가가 있나요?
제가 정말 멋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아직 한 사람이에요. 영국 작가인데 유리를 가공해 글자를 만드는 분이죠. 전통 방식과 기술로 유리 위에 글자와 문양을 새겨 간판이나 장식물을 만드는데 그 과정을 보면서 감동 받았어요. 한번씩 아래 영상을 감상해보세요. 작품뿐만 아니라 작업 과정도 정말 예술입니다.

David A Smith – Sign Artist

로고 작업에 대한 소개도 해주세요.

대학 때부터 “Make your logo”라는 타이틀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개인당 하나씩은 자신만의 로고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죠. 개인 서명(sign)은 둘째치고 나만의 디자인, 나만의 로고를 통해 개인의 가치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죠. 틈날 때마다 친구들과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로고를 만들어주고 있어요. 페이스북 프로필에 어정쩡한 ‘셀카’ 사진보다는 그들만의 로고를 디자인해 올려두면 더욱 돋보이지 않겠어요? (웃음)

세 가지 각기 다른 펜의 매력. 위에서부터 Pentel의 세필펜, ZIG의 캘리그라피 펜, Faber Castel의 아티스트펜.

주로 어떤 필기구를 사용하나요?

많은 펜을 쓰긴 하지만, 주로 사용하는 도구는 세 가지 정도 돼요. Pentel의 세필펜과 ZIG의 캘리그라피 펜, Faber Castel의 아티스트펜 등이죠. 필기구는 주로 사용하는 펜들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편이에요. 최근에 애용하는 또 하나의 필기구를 꼽자면 갤럭시노트도 있겠네요. 굉장히 좋아요. 기본 구성품인 에스펜으로 글씨를 쓰는데 그림이나 이미지를 불러와 그 위에 다양한 느낌의 손글씨를 써서 레이어처럼 얹을 수 있어요. 손글씨 작업 시안을 갤럭시노트로 만들어 보내주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써서 보여주기도 하죠. 필기감이 처음엔 조금 어색할 수 있지만 익숙해지면 활용도가 높아요.

계획이 있다면요?
지금은 <장영호 손글씨 프로젝트 VOL.1>이에요. 이렇게 거리에서 언제까지 작업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다른 프로젝트를 생각해보고 있어요. 노트는 비나 눈에 젖으면 상품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거든요. 선물을 포장할 때 함께 동봉하는 카드를 손글씨 노트로 대체해도 좋을 것 같아요. 카드는 쉽게 버려지거나 잃어버릴 수 있지만 손글씨 노트는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도 전달할 수 있고 오래 곁에 두고 사용할 수 있잖아요. 기회가 되면 책 작업도 해보고 싶어요. 우선 두 권 정도 구상하고 있는데, 하나는 이렇게 거리에서 손글씨 프로젝트를 하면서 모아둔 여러분들의 사연과 글귀를 정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앞서 얘기한 ‘컵 캘리’ 작업을 정리하는 거에요. 그 전에 노트도 많이 팔고 행사에도 많이 참여하면서 최대한 캘리그라피와 손글씨 매력을 많이 많이 알리고 싶습니다. 강남으로 놀러오세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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