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고 잘 사는 디자이너, 조경규

맘만 먹으면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단란하게 한솥밥을 나누어 먹을 수 있다면,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닐까? 더군다나 좋아하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만화로 그려 많은 이들의 식탐을 대리만족 하도록 도와주는 삶은 어떨까? 디자이너이자 만화가이자,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조경규 작가는 그런 복된 삶을 살고 있다.

취재. 윤유성 기자 outroom@fontclub.co.kr 

자료제공. 조경규 작가

웹툰도 꾸준히 연재 중이신데요. 근황이 궁금합니다. 
지난 해 말에 <오무라이스 잼잼> 3권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현재 ‘다음 만화속 세상'(http://cartoon.media.daum.net)에서 웹툰으로 다음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어요. 얼마 전엔 어린이 책 일러스트 작업도 하고, 안은미 선생님 공연 포스터와 티켓, 프로그램 책자를 디자인했습니다. 음식 일러스트도 꾸준히 그리고 있고 단행본 표지나 앨범 디자인 등 이런저런 그림과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어요. 특히, 안은미 선생님과는 10여 년 전에 처음 웹 사이트를 만들어 드린 뒤로 꾸준히 작업해 오고 있죠.

 
 

디자이너,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아티스트 등 다방면으로 활동 중이신데요.

제 블루닌자(http://blueninja.biz) 명함에는 카다로그, 홈페이지, 책디자인, 일러스트, 명함, 로고, 인쇄, 영상제작 등을 ‘신속정확’하게 해드린다고 적어두긴 했어요. 곁다리를 많이 걸치고 있어 쑥스러운 일이기도 하죠. (웃음) 그 중 하나의 일에 몰두하고 계신 분들에게 명함을 내밀진 못할 거에요. 그런데 이것저것 작업하는 게 좋아요. 제가 주워들은 이야기 중에 “새로운 음식을 먹게 되면 뇌가 자극을 받아 좋다”는 말이 있는데요. 예를 들어 같은 김치찌개를 먹더라도 참치, 돼지고기 등 다른 재료를 넣어 새롭게 만들어 먹으면 뇌에 신선한 자극이 된다는 것이죠. 이런저런 작업을 병행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요. (웃음)

조경규 작가의 만화책

잡지 및 단행본 표지 일러스트 작업과 앨범 디자인 작업

안은미 무용가 공연 포스터(위)와 강익중 작가 작품집 단행본 작업(아래)

이제 40대에 접어드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예전부터 마흔이 되고 싶었어요. 작가들은 대부분 40대에 가장 좋은 작품들을 내놓는 것 같거든요. 어릴 적 열정이 어느 정도 남아있으면서도 너무 설교투도 아니고, 기술적으로도 가장 완성도가 높은 시점이 40대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흔이 되기를 기다리긴 했는데, 모르죠. 이제 시작이니까 10년간 어떻게 될지 가봐야죠. 기분은 좋아요. 제 성격이 워낙 좋은 것만 보려는 스타일이라 좋게 생각하고 있어요. 기복이 크지 않아서 항상 비슷하게 흘러가는 편이죠.

 
 

머리카락을 항상 짧게 유지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생각해보니 15년 전쯤부터 짧게 유지하고 있는 거 같네요. 중학교나 고등학교 시절까지 따지면 더 오랜 시간이겠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머리를 길러보기도 했는데 미국으로 유학 가서 머리를 밀었어요. 이발소에 갔는데 영어로 어떻게 잘라달라고 설명하기도 쉽지 않고 마침 여름이라 날씨도 덥고 해서 짧게 잘라버렸죠. 처음엔 빤질빤질하게 밀었는데 이젠 3주에 한 번 정도 짧게 잘라주고 있어요. 무엇보다 편해서 좋아요. 자다 일어나도 머리 손질할 필요도 없고요. (웃음)

 
 

미국 프랫인스티튜트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셨죠.
네, 맞아요. 고등학교 때 생물, 생명, 진화에 빠져들어 생물공학을 전공하게 되었는데 제 길이 아닌 걸 뒤늦게 깨닫고, 군대에 다녀와서 프랫인스티튜트(www.pratt.edu)로 진학해 미국에서 4년간 살았어요. 1990년대 중반부터 홈페이지 디자인도 하고 <피바다공작실> 같은 개인 작업도 했는데, 유학을 가서도 학교 과제하는 걸 싫어해서 과제도 작업으로 해갔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좋아하는 중국음식도 많이 먹고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강익중(http://ikjoongkang.com) 작가님을 직접 뵙기도 했죠. 지금 와이프를 만나기도 했어요. 얻은 게 굉장히 많은 유학 시절이었죠.

국내에 웹 서비스가 본격화될 즈음 웹을 통해 선보이며 ‘조경규’라는 이름을 널리 알렸던 <피바다공작실> 작업 중 일부.

미국에 이어 얼마 전엔 중국에서도 생활하셨는데요.
몇 년 전, 중국에 거주하면서 디자인 작업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어요. 마침 <차이니즈 봉봉> 베이징편을 계획 중이기도 해서 디자인 작업으로 받은 월급을 중국음식 먹고 취재하는데 쓰느라 100원도 남기지 않고 돌아왔죠. (웃음) 미국이나 중국에 있을 때 좋았던 점은 전화를 자주 할 수 없다는 거였어요. 한국에 있으면 전화도 자주 오고 미팅 자리도 많아 생각보다 빼앗기는 시간이 많거든요. 그래서 외국에 나가 있으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았죠. 낮이나 밤에 작업하고 아침에 일어나 메일을 확인하고 회신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어 좋았어요. 그렇다고 클라이언트나 사람을 귀찮아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이런 인터뷰 자리처럼 좋은 시간도 있죠. (웃음)

 
 

음식 만화를 연재 중이신데요. 소재 고갈에 대한 걱정은 없나요?
다행히 그런 걱정은 없어요. 음식은 끝이 없으니까요. 막상 음식 만화를 작업해 보니 소재가 굉장히 많더라고요. 저도 계속 새로운 음식을 먹으면서 알지 못했던 사실을 배워가기도 하고, 예전에 먹었던 음식을 접하면서 잊혀졌던 기억을 되찾기도 하죠. 사실, 개인적으로 음식 만화를 무지하게 좋아했어요. <미스터 초밥왕>은 말할 것도 없고 다양한 음식 만화를 봤거든요. 그런데 제가 음식 만화를 시작하면서 그 작품들을 다시 들춰보니 방향이 많이 다르긴 하더군요. 기존 음식 만화들은 대부분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소년 성장 만화에 가깝고, 존재하지 않는 허황된 요리와 과장된 표현들이 많아요. 어디 가서 먹어볼 수 없는 음식들이 등장하죠. (웃음) 저는 주변에 있는 음식과 가족 이야기가 편해요.

 
 

꾸준히 연재를 하려면 자료조사도 많이 하고 공부도 해야겠네요.

음악 틀어놓고 누워서 책 보는 걸 좋아해요. 인터넷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웹툰은 거의 보지 않죠. 만화책도 보고 소설책도 보고 교양과학 서적도 좋아하는데 특히 우주, 생명, 진화와 관련된 책들을 즐겨보는 편이에요. 8시간 자고, 6시간 일하고, 10시간 여가생활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오늘도 8시간 자고 일어나긴 했는데 요즘은 일을 조금 더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저는 일과 여가시간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워요. 아시다시피,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찾아서 먹거나 만들어 먹는 일이 제 만화나 일러스트 작업을 위한 일이기도 하거든요. 운이 좋은 거죠. 어떻게 생각하면 작업을 위한 취재가 일이면서도 생활이자 노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생활 공간이자 조경규 작가의 작업실

작가님 작업실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8살 된 딸과 7살 아들이 있는데요. 집에서 일을 하고 있다 보니 작업을 할 때도 아이들이 오고 갑니다. 집중해야 할 때는 문을 닫아두고 작업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아이들이 뛰노는 가운데 작업하고 있어요. 제 옆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기도 하죠. 저는 집중하면 작업이 산으로 가는 편이라 오히려 더 좋아요. (웃음) 그림 그리는 작업실로 쓰는 방이 하나 있긴 하지만 거실과 안방을 오가며 컴퓨터로 인터넷도 하고 일도 하고 있어요.

 
 

작업실을 생활공간에서 분리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어려서부터 집이라는 공간을 좋아했어요. 대학에 다닐 때도 집에 오는 게 좋았고, 유학을 다녀와서도 부모님과 생활하면서 일을 시작했죠. 미국에 있을 땐 기숙사가 집이었고 중국에선 가족이 머무는 공간이 집이었어요. 집에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좋아요. 밖에 나가있으면 집에 들어가고 싶어지고, 집중해서 일을 잘 못해요. 예전에 1년 정도 오피스텔을 얻어 작업해봤는데, 집에 가고 싶어 일에 집중하기 어려웠어요. 참고해야 하는 책도 집에 많고, 이리저리 오가면서 작업하길 좋아해서 생활공간과 작업실을 굳이 분리하진 않아요. 조금 늘어지기도 하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아요.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집에 소파도 없어서 그렇게 심각하게 늘어지지도 않죠. (웃음)

조경규 작가의 홈페이지(위)와 즐겨찾는 사이트(아래). 어떤 물건이 새로 올라왔는지 매일 확인하고 있는 토이스타일(http://toystyle.co.kr)과 블루유에프오(www.blueufo.com)

개인 홈페이지 ‘블루닌자’를 운영 중이신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오래 전에 만든 이름이라 상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사실 큰 의미는 없어요. ‘닌자’는 그림자 같은 존재잖아요. 어딘가 숨어서 물처럼 흐르듯이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죠. 저도 디자이너로서 그런 존재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디자인 일을 의뢰 받았을 땐 제 ‘색’을 최대한 빼고 클라이언트의 필요와 요구에 맞춰 작업하려고 노력하거든요. 클라이언트를 빛내주는 역할이 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블루닌자’라고 정했던 것 같아요.

 
 

작업할 때 작가님만의 원칙이 있다면요?

마감과 약속은 무조건 지킵니다. 프리랜서 디자이너에게 시간과 신뢰는 금이기 때문에 주어진 일은 미루지 않고 그때그때 처리하고 있죠. 바로 하지 않으면 잊혀지고 하기 싫어지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한 번 작업을 맡겼던 클라이언트는 계속 저는 찾아주시는 편이에요. (웃음) 안은미 선생님이 대표적인 경우죠. 제가 추구하는 색감도 좋아해주셔서 작업을 의뢰하실 때 이젠 특별히 주문하시는 게 없어요. 마음껏 해보라며 전적으로 맡겨주시는데, 항상 기대 이상으로 서로 만족하는 결과물이 나오죠.

개인 작업을 모아놓은 사이트, 바기나(www.bagina.kr)

디지털 꼴라쥬 작업

복고풍 작업들

작가님 스타일의 ‘정서’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요?
어릴 적 정서 같아요. 그때 좋아했던 것들을 지금도 좋아해요. 유치하고 화려한 것들이죠. 집에 <우뢰매> DVD박스 세트가 있는데 어제 아이들과 오랜만에 다시 보기도 했어요. 물론 제가 우뢰매를 좋아한다고 그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진 못해요. “<우뢰매>를 만들었던 김청기 감독님이 지금 그래픽디자인을 한다면 어떨까?”라는 가정 하에 작업은 할 수 있겠죠. 지금의 정서이긴 하지만 그런 감성이 덧입혀지는 것이죠. 저는 길거리 광고 전단지도 많이 모아두고 있어요. 거의 20년간 수집했죠. 전단지 디자인이야말로 그래픽디자인의 최전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전단지는 소비자들이 즉각 반응해야 하기 때문에 “나 좀 봐달라”는 생존의 문제로 연결되죠. 색감도 그렇고 디자인 강약이나 레이아웃 모두 엉망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전단 디자인이야말로 그 시대의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절박함이 느껴지죠. 멋지고 예쁜 디자인도 좋지만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어요. 저는 정보가 눈에 확확 들어오는 디자인이 좋아요. 전체적인 조화도 좋지만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정보가 명확하게 전달되는 디자인이요. 명함도 그래요. 그 넓은 지면에 글자는 왜 그렇게 작게 넣는지. (웃음) 아마도 제가 디자인 작업만 하고 있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제가 디자인만 했다면 제 목소리를 담고 싶어졌겠죠.

 
 

전단지 스타일로 작업할 때 참고할 수 있는 팁이 있다면요?
키치(kitsch) 스타일로 작업할 때 말씀 드릴 수 있는 첫 번째 팁은 CMYK 원색을 써야한다는 거에요. 색을 C100, Y100, K100 등으로 사용하고 중간색이 없어요. 색을 많이 섞지 않고 미색도 없죠. 그 조합도 조화롭게 만들려고 노력하면 느낌이 약해져요. 집에 붙어있는 중국집 전단지를 보세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느낌이 올 거에요. 그리고 ‘누끼’도 중요해요. 약간 어설프게 누끼 딴 사진이 CMYK 위에 하나 올라가면 느낌이 확 살 거에요.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웃음) 그리고 저는 사람들이 사용하길 꺼려하는 HY둥근고딕이나 HY그래픽 같은 폰트를 좋아해요. 이런 폰트를 필요로 하는 작업들이 꽤 있죠.

 
 

아티스트로서의 포부나 개인작업에 대한 욕심은 없나요?
틈틈이 개인작업은 해오고 있어요. 그런데 미술도 좋고 아트도 의미가 있겠지만 잘 알고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한다는 점이 조금 아쉬워요. 만화를 그리면서 가장 좋은 부분은 독자들과 바로 연결된다는 점이에요. 그분들과 소통할 수 있어서 좋아요. 아버지도 제 예전 작업에는 관심이 없는데, 제 만화는 책도 읽어보시고 온라인 연재도 찾아보시거든요. 아버지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죠. 
내 생각과 나 자신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너무 어려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워낙 단순해서 딱 봤을 때 좋은 게 좋거든요.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단순함 속에서 미학을 발견하기도 하죠. 요즘은 만화가 제 개인작업 같아요. 만화가 좋아요.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그 안에서 레이아웃을 잡으면서 디자인도 할 수 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이 그 안에 모두 녹아있는 셈이죠.

중화요리 식도락 만화 <차이니즈 봉봉>

3권까지 출간된 일상 음식 만화 <오무라이스 잼잼>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요?
내일은 내다볼 수 없는 일이라 원대한 계획은 없어요. 우선 주어진 만화도 그리고 디자인 작업도 해야죠. <오무라이스 잼잼>은 꾸준히 단행본으로 만들고 싶어요. 제가 손자를 볼 때까지 매년 한 권씩 출간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죠. 이 만화는 제가 생각해도 좋은 만화 같아요. (웃음) 매년 아이들도 커가고 독자도 커가고 저도 커가잖아요. 연애도 하고 이별도 하고 결혼도 하겠죠. 음식과 가족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이어질 거에요. 욕심 부리지 않고 딱 이만큼만 하면 좋겠어요. 앞에서 40대 작가에 대한 얘기를 했지만, 40 이후에 대하소설, 대하장편 작업을 하면서 재미없게 망가지는 작가들을 보면 안타까워요. 저는 욕심 부리지 않고 소박하게 꿈꾸려고요. 소품들로 독자들과 꾸준히 소통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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