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디자이너.10_<그린보이> 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스타들의 감각적인 패션 화보와 동물, 환경 이야기를 ‘문화’라는 키워드로 쉽게 풀어낸 잡지 <오보이!>. 하지만 배포처를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 보니 읽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어서 막막했던 독자들이 많았다. 단행본 <그린보이>는 2009년 11월 <오보이!> 창간호부터 2012년 5월 현재 27호까지 그 안에 담긴 김현성의 글과 사진들을 묶고, 못다 한 이야기들을 담아 좀 더 촘촘하게 엮어낸 책이다. 자연과 사람과 동물이 더불어 사는 지구를 만들기 위한 방법들을 여덟 가지 큰 이야기들로 풀어내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패션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지구도 지키면서 자신도 함께 멋있어질 수 있는 Best shopping means smart shopping(현명한 소비) 챕터를, 채식에 도전해 보고 싶었던 독자라면 Natural foods makes you(채식) 챕터를, 유기동물에 관심 있던 독자라면 Give your heart to animal(동물복지) 챕터를, LP의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 독자라면 Once upon a time(아날로그) 챕터를, 그 동안 <오보이!>에 나왔던 화보와 인터뷰를 보고 싶은 독자라면 Your story(사람) 챕터를 읽으면 된다. <오보이!>를 좋아했던 독자에게는 종합 선물세트가 되고, <오보이!>를 몰랐던 독자들에게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나는 동물을 사랑하는 패션 포토그래퍼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동물을 사랑하면서 과장된 환상의 창조로 소비자를 현혹하고 소비를 부추기는 패션 포토그래퍼죠. 동물을 사랑하는 내가 동물복지와 환경에 신경 쓰면서 패션 포토그래퍼로 살아간다는 건 참 힘든 일입니다. 사진으로 먹고 살지만, 내가 추구하는 것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일들을 많이 해야 하는 내 직업은 종종 날 회의감과 무력감에 빠져들게 하니까요.” – 29쪽

“<그린보이>를 만들면서 내가 했던 가장 큰 고민은, 이 책을 만듦으로 인해 베어질 나무와 낭비될 수많은 에너지, 그로 인해 망가질 지구였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책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만드는 취지와 담긴 내용에 부합하는 실천으로, 이왕이면 친환경적인 책을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 11쪽

<그린보이>는 책을 만드는 제작 과정에서부터 독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고민한 책이다. 독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친환경을 강조하기보다는, 독자들이 직접 책을 읽으면서 즐겁게 친환경을 경험하고 그 장단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세 가지 종이를 사용하여 일반종이와 재생종이를 직접 비교할 수 있게 구성했고,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에코폰트를 활용해 잉크 절약과 동시에 책에 재미를 주었다. 또한 표지에 어떠한 가공도 하지 않아 나만의 손때가 묻어가는 종이책 본연의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환경보호나 동물복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많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은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좋은 이야기인 것은 맞지만, 사람들이 읽기에 지루하거나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오보이!>가 선택한 것이 스타들의 패션 화보라면, <그린보이>에서는 패션계의 러브콜을 한 몸에 받는 패션 포토그래퍼 김현성 특유의 감각적인 사진으로 보는 즐거움을 더하고, 딱딱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통계 자료들을 쉽게 풀어내는 방식을 택했다. 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 믿는 바를 분명하게, 그러나 부드러운 방법으로 자연스레 이야기하는 책이다.

“환경이 그러게 중요한가요?”
“먹고 살기 바쁜데 너무 사치스러운 생각 아닐까요?”
“다들 슬로라이프를 얘기하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요?”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너무 많은데, 복잡하지 않나요?”
너무 어렵고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슬로라이프는 꼭 뭔가를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게 아니라 작은 생각의 변화로부터 시작되니까요. 내일 집으로 돌아올 때 한 정거장 일찍 내려서 천천히 걸어 보는 건 어때요? 슬로라이프가 시작되면 건강한 인생이 시작됩니다. – 93쪽 

“아날로그는 추억입니다. LP는 현재의 아날로그입니다. 아이팟은 미래의 아날로그입니다. 아날로그는 지친 현대인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선물입니다. 낡은 것은 버릴 것이 아니라 지키고 가꿔야 할 무엇입니다. 가끔은 뒤도 한 번씩 돌아보세요.” – 257쪽

“이 책은 각박하고 정신없는 요즘 세상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객관적으로 인생을 점검하는 책입니다. 조금 더 느리고 조금 더 의미 있는 생활을 통해 자연과 사람과 동물이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지구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한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꽉 막히는 도로 위의 자동차에 혼자 앉아서 다른 자동차들을 원망하고 있을 누군가를 위한 위로입니다. 쏟아지는 인터넷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잠시 빠져 나와도 뒤지지 않을 거라는 이상무 신호입니다. 느리게 살면 인생도 천천히 간다는 단순한 명제입니다.” – 6쪽

그는 책 속에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 하고, 동물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 한다’가 아니라, 사람 스스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떤 것들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그린보이>는 정신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진정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이타적인 삶의 즐거움을 배울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 주는 책이 될 것이다.

김현성
동물을 사랑하는 패션 포토그래퍼. 밤식이와 먹물이, 그리고 뭉치의 아빠. 환경과 동물을 생각하는 패션 문화잡지 「Oh Boy!」의 발행인이자 편집장. 017 번호의 2G 휴대폰을 쓰고, 아이팟보다는 LP가 좋다는 구닥다리 아저씨. 알수록 힘들지만 할수록 즐겁다는 채식주의자. 유행을 좇지 않아도 베이직하게 멋진 남자. 미스코리아도 아닌데 세계 평화가 소원인, 자연과 사람과 동물이 더불어 사는 작은 별 지구를 꿈꾸는 사람.

20세기에 들어 비약적인 경제성장이 이뤄지면서 그 속에서의 주거 양식 또한 서구적 형태로 규격화, 획일화되었다. 최근에는 주거문화에 대한 패러다임과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인해 주거 트렌드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긴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한옥집’은 여전히 옛 것이라는 과거의 형태로 남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자연친화적이며 고즈넉하고 정겨운 분위기라는 장점이 있지만 불편한 점도 신경 써야 할 점도 많아 다소 까다롭다는 단점 또한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율이네 집은 바로 통의동에 위치한 작은 한옥집이다. 

책 속에 있는 집과 사진이 예뻐 읽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저자는 문구 브랜드 ‘공책(O-CHECK)’을 만든 디자이너였다. 개인적으로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책이란 브랜드를 애호하고 애용해 왔던지라 이런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그 제품들이 소박한 한옥집에서 천천히 흐르는 삶을 살아가는 그들과 많이 닮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 눈을 뜨면 마주하는 삭막한 콘크리트 벽, 네모난 전철 안에서의 부대낌, 열리지 않는 창이 빼곡하게 박힌 빌딩 속에서 우리의 일상과 말이 어색하고 딱딱하고 뾰족해진 게 아닐까. 공간의 생김이 어느새 인간의 삶을 빚어내고 있는 건 아닌지…” – 6쪽 

“더 좋은 것, 더 빠른 것, 가장 최신의 것만을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조금 느려도 괜찮고, 새 것이 아니어도 좋아. 라고 말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품게 해준 한옥집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 7쪽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급하게 달려가던 스무 살 무렵의 여자아이는 어느 벚꽃 흩날리는 봄날에 찾아간 선생님의 한옥집에서 다감한 위로를 받게 된다. 하늘과 처마 끝, 단정한 장독대, 바람에 가늘게 떠는 문풍지 소리… 소박하고 오래된 것에서 나오는 조용하고 따스한 바람. 율이네 가족이 지금의 이 작은 한옥집을 만나게 된 것은 그날의 짙은 여운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율이네는 이사 전 집을 고치는 과정을 거치면서 뭔가 거창한 의식과도 같은 비움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가지고 갈 수 없는 가구와 짐을 정리하였고, 담백한 벽과 나무 기둥 등은 이미 자기만의 빛깔을 내고 있었으므로 고급 마감재나 가구, 세련된 벽지들은 그야말로 쓸모 없는 덧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집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반드시 보수가 필요한 부분만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책을 통해 한옥집에서 연출할 수 있는 소소하지만 센스있는 인테리어 팁이나, 소품 제작, 공간 활용에 대한 정보도 엿볼 수 있다. 연애시절부터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고, 판매하는 일을 좋아했던 부부는 버려진 문짝이나 창문 등을 멋스러운 테이블과 수납장으로 변신시키고, 정겨운 나무 그릇과 질 그릇에 마당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로 소박한 밥상을 차리고, 한땀한땀 정성스럽게 만든 앞치마, 쿠션, 방석, 커튼 등을 집 안 구석구석에 두어 작은 부분까지 빛나게 한다.

 

소파 없는 한옥의 마루에 모여 앉아 고구마를 먹는 일, 율이와 나란히 누워 책을 읽는 일, 마당에서 불어 온 바람, 비 오는 날 마당 그득히 퍼지는 향긋한 풀냄새, 햇살 담은 뽀송뽀송 빨래 냄새가 담겨 있는 책. 요리를 즐기는 아빠가 스파게티를 만들면 율이는 마당에 있는 바질을 따오고, 샐러드를 만들 때면 야채의 물기를 빼는 일을 도맡아 하는 율이. 율이는 이런 시간을 통해 자신이 가족의 일원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자랑스러워한다고 한다.

어느 날 마당에서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던 율이가 내게 말했다. 
“엄마, 나는 한옥으로 이사와서 참 좋아. 기와지붕이 정말 예쁜 것 같아. 마당에서 뛰어 놀아도 되고, 매일 하늘도 볼 수 있잖아.” 
율이도 나처럼 이 집의 기억을 마음 한 편 어딘가에 넣어두고, 가슴이 시릴 때마다 꺼내 들고는 행복해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나의 엄마를 기억하듯 그렇게 자신을 아낌없이 사랑해준 엄마로 기억하면 좋겠다. – 79쪽

율이네 가족의 손길과 온기로,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그들의 모습을 닮아갈 한옥집. 
그리고 그런 한옥집처럼 느리고 향기로운 삶을 살아갈 그들을 보며 
나 또한 훗날 이런 곳에서 살 날을 꿈꾸어 본다. 

글. 땡스북스 최혜영

조수정
대학에서 의상학을 공부하고 오브제/오즈세컨과 쌈지에서 비주얼 머천다이저로 일했다. 그러다 2000년 12월 남편과 함께 손맛이 살아 있는 디자인 문구 브랜드 ‘공책 디자인 그래픽스(O-CHECK DESIGN GRAPHICS)’를 만들었다. 쓸모 있는 물건 못지않게 마음에 필요한 물건들의 소중함을 아는 그녀는 문구 브랜드 공책을 확장해, 리빙 디자인 회사 ‘스프링 컴 레인 폴(SPRING COME, RAIN FALLl)’을 남편과 함께 설립하여 현재 디자인 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요리하는 남편과 자전거 타는 아들이 보이는 마루에서 예쁜 소품을 만드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며, 천천히 흐르는 삶의 소중함을 알려준 한옥이 너무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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