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전자책을 말하다.3_때로는 모호함을 즐길 줄 알아야 새로움이 싹튼다
현재의 전자책 시장을 바라보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유통 규모는 커졌지만 각각의 서비스들이 사용자에게 전달하는 가치는 극도로 획일적이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국내 전자책 시장을 움직이는 주체들이 시장 초기의 안전성을 추구한 까닭이겠지만,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IT판에서 현재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위기의 시작임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기에 그들이 취할 앞으로의 행보에 더욱 관심이 집중되는 요즘이다.
글. 박윤호 포도트리 UI/UX Lab 디렉터 겸 이사
국내 시장의 더딘 흐름과 달리 세계 곳곳에서는 차별화된 가치 발굴과 나아가 사업화를 위한 시도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지금부터 살펴볼 서비스들은 전자책이라 정의하는 것의 본질적 개념과 유통, 확산과 사용자 경험의 공유라는 관점에서 기존 틀을 깨거나 재해석한 사례들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고 경험했던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우리에게 낯설거나 명확히 무엇이라 정의하기에 모호한 부분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자. 낯섦과 모호함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익숙함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이번 글에서 소개할 두 사례들이 단도직입적인 해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전자책을 바라보는 우리의 딱딱한 고정관념을 적절히 유화시켜주길 기대하며, 나아가 새로운 혁신의 씨앗으로 작용하길 바란다.
평범했던 나와 내 이웃을 작가로 만들다
첫 번째 글에서도 언급한적이 있지만, 전자책의 개념과 형태에 대해 먼저 고민하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 노력은 국내보단 해외에 그 사례들이 많다. 2009년 아마존을 필두로 거대한 성장을 이루던 기성 전자책 시장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온 ISSUU(www.issuu.com)라는 서비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가, 기업의 홍보 담당자, 평범한 주부 등 누구든 이 서비스를 통해 자신이 만든 PDF 파일을 등록만 하면 인터랙티브한 온라인 매거진을 만들 수 있는 열린 출판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다양하고 넓어진 저자층 덕분에 생산되는 저작물의 소재 또한 소설, 예술, 문학, 실용, 포토에세이에서부터 기업의 홍보지까지 그 스펙트럼이 너무나도 다양하게 분포한다는 것 또한 이 서비스의 경쟁력이다. 2009년 당시 <TIME>에서 선정한 전세계 50개 베스트 웹사이트 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주목 받기 시작한 이 서비스의 성공을 눈 여겨 보며 그 요인들을 면밀히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ISSUU(www.issuu.com) 홈페이지
서비스 사용자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카테고리의 확장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에 대응해 다양한 문서 폼의 종류를 늘리고 품질을 높이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2009년 타임 웹사이트에 소개된 ISSUU.
먼저, 저작 과정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에 제한이 없으며 최종 산출물의 파일 형식(PDF) 또한 범용적이라는데 그 첫 번째 성공 요인이 존재한다. 일반적인 출판과 편집 과정을 경험해보지 않은 이들이 책을 만들 때 처음 보는 출판 전용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한다면 시작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ISSUU는 자칫 폐쇄적이거나 낯선 독자적인 저작, 편집 툴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렇게 참여의 대중화에 성공한 것이다.
ISSUU를 통해 발행한 잡지를 보는 뷰어 화면으로 파일의 성격에 맞는 유연한 UI와 가독성의 단점을 보완해 주는 사용성 배려가 인상적이다.
PDF 단일 포멧으로 시작해 워드, 액셀, 파워포인트 등 대응 가능한 포맷들을 점차 확대해 나가고 있다.
두 번째 성공 요인은 컨텐츠 노출의 개방성에 있다. ISSUU는 다운로드 방식으로 컨텐츠를 소유하기 때문에 저작권에 민감한 기존 틀에서 벗어났다. 네트워크가 연결된 상태에서 자유롭게 열람하고 심지어 내 블로그나 게시판에 인베딩(embedding)하는 등 소유와 통제 보다는 자유로운 공유와 확산 속에서 전자책의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자책 쓰임이 가족끼리 공유하는 사진첩, 대학 동아리를 알리는 홍보지, 아마추어 사진 작가의 포토 에세이, 잡지사의 홍보를 위한 무료 과월호, 내 이웃의 음식 레서피 등 실생활과 좀더 밀접한 형태로 제작되고 소비되기 시작했으며, 높기만 했던 출판 저자의 역할이 내 이웃, 더 나아가 평범하기 그지없던 나 자신으로까지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발행된 컨텐츠와 뷰어를 다양한 서비스 내에 쉽게 임베딩할 수 있도록 서비스 범위를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방대한 카테고리 속에서 보석 같은 틈새를 발견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살던 20대 한 청년이 있다. 그는 어느 날 친구들 모임에서 자기만의 빵 만드는 법을 설명하다 “단계 단계별로 연속성 있게 이어지는 것들을 쉽게 만들고 공유할 수는 없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 친구들과 함께 아이디어를 실행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몇 달 뒤 스마트폰을 이용한 사진, 동영상, 텍스트의 간단한 조합을 통해 가이드 북을 제작, 유통,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내놓게 된다. 그 플랫폼은 전세계 IT 매체들의 극찬을 받으며 성공적인 첫 출발을 알리게 된다.
스냅가이드(Snapguide) 서비스를 만든 7인의 창업 멤버
아직 국내에는 다소 낯설지만, 가이드북이라는 특수한 틈새(niche)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스냅가이드(Snapguide, http://snapguide.com)라는 서비스의 탄생 뒷이야기다. 하루 기준으로 사용자가 직접 제작한 수백여 개의 가이드북이 신규 발행되는 비교적 크지 않은 규모의 서비스이지만 또 하나의 유사 전자책 서비스로 단순히 치부해 버리기엔 스냅가이드가 시사하는 잠재적인 가치는 굉장히 훌륭하다.
먼저 이들이 주목한 서비스의 소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책이라는 방대하고 모호한 카테고리 속에서 ‘How to~’로 대변되는 ‘~하는 방법’이 차지하는 가치를 잘 찾아냈다. 책이 저작되는 다양한 목적 가운데 ‘방법과 지식의 습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으며, 책이라는 매체의 근원적인 존재 이유와도 잘 맞닿아 있다는 점을 새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는 방법’이라는 제한 속에서도 다양한 소재의 확보가 가능할 수 있었고 신규로 생성되는 가이드북에 비례해서 저작물의 수요 또한 급격히 늘어나게 된 것이다.
다양한 내용의 컨텐츠가 올라오고 있는 스냅가이드
또한, 스냅가이드는 기존 PC 기반 베이스를 과감히 탈피했다. 스마트폰 기반으로 저작, 발행, 유통을 가능하게 만든 단순하면서도 높은 사용성이 확보된 스냅가이드의 플랫폼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사용자에게 많은 기능을 제공하면 필연적으로 서비스와 사용성의 복잡도는 올라가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냅가이드는 철저하게 서비스 타깃을 넓게 정의하며 기능과 사용성에서 극도의 심플함을 추구한다.
사용자의 자유도를 제한하는 대신 사용자가 만든 가이드북의 평균적인 퀄리티를 상향 평준화 해주는 UI를 제공해 미적 감각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람도 부끄럽지 않은 퀄리티의 가이드북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컨텐츠를 올린 사용자는 저작물의 가치를 몇 배 이상으로 배가 해주는 UI 퀄리티를 추가적으로 얻은 덤으로 느끼게 된다. 결국, 전자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용자가 느끼는 막연한 부담감과 어려움을 사용자에게 전가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차별화된 노력을 통해 일반 대중들도 얼마든지 가치 있는 전자책을 발행하는 능동적인 컨텐츠 생산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스냅가이드는 기존 PC 기반 베이스를 과감히 탈피했다.
서비스 곳곳에 발행자와 독자간의 다양한 소통의 통로를 효과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와 독자간에 원활한 소통이 가능한 구조 속에서 사용자 주도하에 관리되고 진화하는 플랫폼을 지향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발행된 컨텐츠를 보는 과정에서 페이지 단위로 덧글을 달며 저자와 독자간에 생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고, 곳곳에 열려있는 소통의 통로를 통해 독자 주도하에 좋은 컨텐츠를 선정하고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 구조다. 운영자의 무리한 개입에 의해 노출과 마케팅이 결정되는 기존 전자책 유통 방식과 달리, 컨텐츠를 사이에 두고 소셜의 적절한 개입을 통해 서비스와 컨텐츠에 신뢰성을 부여한 모범 사례로 보기에 충분하다.
여기까지 전자책의 가능성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주요한 지표가 될만한 대표적인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종이책이 디지털 파일로 변환되어 유통되며 전자책이란 단어가 최초로 사용 되었기 때문에 이것에 근거해 이미 딱딱하게 굳혀진 전자책 개념이 단기간에 유연해 지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IT 영역으로 책의 개념이 확장된 이상 IT 변화의 속도에 맞춘 전자책 모델의 적절한 진화가 필요함을 점점 체감하게 된다. 전자책에 대한 새로운 유통구조나 개념의 재해석 과정에는 다소 모호함의 경계가 여전히 존재 하지만, 어찌 보면 그 모호함 때문에 전자책의 새롭고 유연한 핏(fit)은 무궁무진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서비스의 형태로 유통되는 전자책 케이스를 위주로 살펴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앱북 형태를 통해 규모는 작지만 독특한 시도들을 하고 있는 국내외 사례들을 살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