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활자체 VS. 디스플레이 활자체

 

 
 

글. 유지원(타이포그래피 칼럼니스트)

  

“활자가족 구성원의 이름을 볼드, 레귤러, 라이트 대신, 사용자들이 어느 크기에 적용하면 좋을지 정보를 줄 수 있도록 6, 12, 18, 48 등으로 붙이면 어떨까요? 라틴 알파벳 활자체에서 간혹 그러기도 하지만요.”, “아예 매체 별로 최적화해서, 이를테면 명조 매거진, 명조 간판 등으로 패밀리 네임을 붙일 수도 있겠네요.” 새로운 한글 활자체를 기획하는 회의에서 얼마 전 오갔던 대화 내용이다. 보다 아늑하고 풍요로운 타이포그래피적 색채감을 위해, 특정한 환경에 최적화할 수 있도록 활자가족을 점차 역동적으로 구성해가는 것이 최근 활자체 디자인의 추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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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추세에 발맞추어 나타난 대표적인 현상 중 하나가, 크기의 범주별로 폰트를 각각 디자인하는 활자가족의 구성이다. 이른바 ‘크기에 따른 착시 교정용 폰트(optical size font)’라고 부른다. 사이즈군별로, 이를테면, 디스플레이(표제), 서브헤드(소제목), 텍스트(본문), 캡션(각주) 등 각각의 크기에 맞게 특화될 수 있도록, 활자가족의 구성원들을 모두 달리 디자인하는 것이다.

 

90년대 초반 그런지 폰트(grunge font)라 불리는 일군의 시끄러운 디지털 활자체의 범람, 탈선적이고 과도한 형태가 남발되던 현상을 뒤로 하고, 이제는 디지털 활자의 시대도 차츰 진정기의 국면에 접어든 듯 하다. 일상에서도 격변하는 시대의 빠른 흐름이 웰빙의 각성을 불러왔듯, 활자체, 특히 본문 기본형 활자체에서는 바야흐로 활자의 ‘슬로우푸드’ 시대라 불릴 법한 새로운 흐름이 등장했다.

 

타이포그래퍼들의 정교하고도 까다로운 요구를 충족시키고, 동시에 독자에게 쾌적한 지면 환경을 제공할 수 있도록 폰트들은 특화되어 가고 있다. 활자는 그 크기에 따라 시각적인 화학 작용이 일어난다. 6포인트 이하 작은 크기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활자체가 있고, 24포인트 이상, 심지어 간판만한 커다란 크기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활자체가 있다. 대체로 9~12포인트의 크기에 최적화된 활자체를 텍스트 활자체, 24포인트 이상의 크기에 최적화된 활자체를 디스플레이 활자체라고 부른다.

 

크게 사용하는 디스플레이 활자체는 유려하고 섬세하며 정교하게 디자인한다. 그리고 시각적 힘이 강해야 한다. 작은 크기에서는 정교한 디테일이 도리어 가독성에 해를 입힌다. 크게 확대해 보면 거칠고 이상하게 보이는 형태적 형질이 오히려 작은 크기에서는 활자체를 원만하게 기능하도록 만든다. 디스플레이 활자체는 보는 영역을, 텍스트 활자체는 읽는 영역을 좀 더 비중 있게 관할한다. 디스플레이 활자체는 날렵한 형태감을 가지도록, 폭을 늘씬하게 좁히고 굵은 부분과 가는 부분의 콘트라스트를 강조한다.

 

텍스트 활자체는 안정된 견고함을 가지도록, 폭을 편안하게 넓히고 콘트라스트를 줄여 두툼하게 만든다. 폭과 콘트라스트 등 전체적인 차이뿐 아니라, 세부의 형태, 속 공간의 분배, 공간의 비례 등이 모두 미세하게 조금씩 달라진다. 디스플레이 활자체는 정교하고 매끈하게 다듬어지는 반면, 텍스트 활자체는 간소하면서도 분명하게 분절된 절도 있는 형태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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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텍스트 활자체가 긴 본문에서 제대로 기능하도록 하려거든, 미려한 형태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텍스트 활자체는 본문의 콘텐츠를 겸손하게 중재해야지, 자신을 뽐내선 안 된다. 그렇다고 시무룩하거나 고루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 활자체는 텍스트 활자체로서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다. 건강한 활력과 생기가 넘치도록 본문 텍스트를 북돋워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텍스트 활자 디자이너는 자신의 에고가 작업을 방해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유혹,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강건함은, 텍스트 활자 디자이너가 가져야 할 미덕이다.

 

텍스트 활자를 연구하고 디자인하는 공간에 단 한 인물의 초상만을 걸도록 한다면, 나는 그 주인공으로 에라스뮈스를 택하고 싶다. 에라스뮈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해서가 아니다. 그의 초상은 이 공간에서 인문주의자인 에리스뮈스적 정신의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표식인 것이다. 이곳은 거칠고 선동적인 언어가 아닌, 세밀하고 사색적인 언어로서 독자를 이해시키는 중재의 즐거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는 의미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활자체는 딱딱한 학문에도 세련된 재치, 온화한 유머, 영리하고 선량한 수완을 잃지 않도록 하는 시각적 말투와 태도를 입히게 될 것이다.

 

한편, 에라스뮈스의 대척점에 선 인물이 한 명 있으니, 그는 혈기 왕성한 마르틴 루터이다. 에라스뮈스와 루터는 실제로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당시 첨단 기술이었던 인쇄술 발명의 놀라운 파장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주도했던 주역들이다. 에라스뮈스와 루터는 인쇄소를 통해 서로 싸웠다. 
인쇄술 발명이라는 미디어 혁명은 언어혁명과 종교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변동의 시기, 루터가 광포한 혁명가로서 한쪽 극단에서 등장했다면, 에라스뮈스는 중간에 서서 온건한 개혁가로 남았다. 에라스뮈스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중립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는 귀족적 문화의 품위와 일상의 평온함을 향유했다. 엘리트적 중재자로서의 그의 문체는 고요한 평정심과 이성을 잃지 않는다. 책의 본문에 곱게 직조된 텍스트 활자체의 역할이 그렇듯 말이다.

 

반면 루터의 언어는 극단적 표현과 광기, 건장한 힘과 정력으로 가득 차 있다. 차분한 에라스뮈스와 달리 루터의 과격한 포효는 민중, 특히 농민을 흔들고 움직였다. 면죄부 판매를 규탄하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인쇄된 서적의 초창기 모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포스터의 전신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짧은 표제용 문구나 단어, 강렬한 이미지로 구성된 본격적인 포스터는 사실 세 세기나 지난 후인 19세기에 등장했다.

산업혁명으로 경쟁이 과열되면서 광고가 전면에 등장하고, 기술적으로는 다색석판화의 자유롭고 현란한 표현이 가능해 진 배경을 등에 업은 후의 일이다. 95개 문항의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루터의 반박문은 19세기 이후의 포스터와 양식적으로는 큰 차이가 나지만, 대중의 눈앞에 펼쳐져 그들을 격정적으로 선동하는 힘에 있어서는 그 이상의 기능을 수행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교회 문 앞에 이 반박문을 힘차게 ‘박았다.’ 유럽 인쇄술 초창기의 종이는 동양의 한지처럼 얇고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에는 종이를 벽에 고정시킬 접착용 테이프도 없었다. 그는 망치로 못을 두드려야 했다. 그렇게 이 조항들이 빼곡히 조판된 인쇄물을 힘껏 때려 박았다. 이 행동을 독일어로는 안슐라겐(anschlagen)이라고 표현한다. 그리하여 안슐락(Anschlag)이라는 단어는 ‘문자로 선포하는 포스터’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루터의 문체는 포스터에 사용되어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는 디스플레이 활자체의 역할을 닮았다.

 

루터의 활자는 대중을 향했고, 에라스뮈스의 활자는 귀족을 향했다. 포스터는 보고자 하는 의도가 없더라도 강제적으로 눈 앞에 보여지지만, 책은 덮인 표지를 직접 펼치는 적극적 행동과 보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접근에 이를 수 있고, 나아가 긴 시간을 들여 읽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그 내용이 전달되고 흡수된다. 책이라는 매체는 그 태생부터 어느 정도 엘리트 지향적이다. 타이포그래퍼이자 활자체 디자이너인 얀 치홀트는 훌륭한 텍스트 활자체로 잘 조판된 지면의 진가는 엘리트만 알아볼 수 있다고도 했다. 공을 들인 텍스트 활자체에 깃든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활자체는 간접적이면서도 오래, 널리 지속되는 영향력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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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는 정신을 담아내면서도, 그 자신은 물질적 육신을 가지고 있다. 지난날의 인문주의적 출판업자들은 그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정신을 아름다운 책의 육신으로 화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 육신의 일부인 활자를 만들어 낼 다재다능한 활자 제작자들은 그들의 중요한 인적 자산이었다. 베네치아의 알두스 마누티우스에게는 프란체스코 그리포가 있었고, 리옹의 장 드 투른과 안트베르펜의 크리스토프 플랑탱에게는 로베르 그랑종이 있었다. 인문주의를 새 시대의 정신에 담는 출판인들의 르네상스, 그 영광과 번영은 아름다운 활자로써 인쇄된 기록으로 남아 전해져 내려오며 빛난다.

 

텍스트 활자를 통해 정신은 인쇄된 육신을 입는다. 육체적 외형이란 내면을 반영하고, 또 정신을 해석하기도 한다. 타이포그래피는 불가피하게 텍스트를 해석한다. 활자의 육신과 텍스트의 정신은 책에서 공존한다. 그러니 텍스트 활자체 디자이너는 정신에 침몰하느라 에너지가 가득한 물질적 세계의 생기를, 육체적 삶의 즐거움을 잃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에라스뮈스의 「우신예찬」에서 어리석음의 여신은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남긴다. “그러니 안녕히, 손뼉을 치고, 열정적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살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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