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편집디자이너의 형식적인 이야기.1_파일 출력 100분 전

글. 이경수(워크룸 디자이너)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입사한 디자인사무실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신입사원이라 특별히 주어진 일이 없음에도 늘 허둥댔던 내게 선배들의 현란한 손놀림은 그 자체만으로도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와 달리 선배들은 항상 여유롭기만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며칠, 아니 몇 주에 걸쳐 완성한 방대한 데이터를 출력소로 넘기기 전, 불과 두어 시간 만에 새로운 디자인으로 탈바꿈시키던 사수의 모습이었다. 거의 100분 정도 걸렸으려나.

출력소(지금은 인쇄소로 직접 보내는 경우도 있음)로 데이터를 보내기 전 100분이라는 시간을 과연 편집 디자이너들은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 보통은 클라이언트 혹은 담당 편집자와 함께 오탈자를 수정하거나, 이미지 모드 및 해상도 정리, 간단한 레이아웃과 오브제의 컬러 변경, 단락 확인 등의 최종 점검 단계를 거치고 있을 터다. 누군가는 종이 샘플이나 컬러칩을 뒤적이며 마지막까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수도 있겠다. 완성된 화면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낙천적인 디자이너의 모습도, 상상 해본다.

나 또한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 인쇄소와 통화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다른 과정으로 그 시간을 채우고 있다. 어쩌면 이 글은 우리 사무실 편집장이 앞서 연재한 오른쪽 흘리기 및 줄바꿈에 대한 실무 버전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런 이야기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니까. 좀 더 나은 오른쪽 흘리기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경험들, 그리고 디자이너 자신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한 단락 스타일을 기본적으로 적용한 이후의 이야기다.

글줄의 시작 지점

글줄의 시작 지점은 언제나 무질서한 상태로 보인다. 기껏 오른쪽 흘리기 여부를 놓고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나름의 글자 간격과 글줄 간격을 지정한 글상자에 텍스트를 흘려놓으면 글줄의 시작 지점에 군데군데 보이는 이 빠진 듯한 모습이 생기곤 한다. 게다가 시작 지점에 한글이 아닌 알파벳이라도 올 때면 왼쪽 정렬(또는 오른쪽 흘리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나름대로 최적이라고 생각하는 글줄 간격, 단어 간격, 글자 간격을 유지했다 하더라도, 더불어 운 좋게 자연스럽게 흐르는 리듬감 있는 형태까지 갖췄다 하더라도 시작 지점이 고르지 않다면 그것은 이상적인 오른쪽 흘리기의 모습이 아닐 게다.

그 불안정한 시작 지점을 만드는 대표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는 따옴표다. ‘구두점 내어쓰기’라는 기능으로 약간 보정할 수 있겠지만, 각각의 구두점 너비 및 지정 공간이 다르고 다음 글자와의 간격이 달라서 일정 간격으로 입력하기엔 또 다른 어색함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만약 커닝을 ‘시각적’으로 지정했다면 다음 글자의 초성에 따라 그 간격은 또 달라진다. 해당 단락의 시작 지점에 가장 넓게 차지하는 따옴표를 기준으로 나머지 글줄을 들여쓰기 해줘야 비로소 칼에 베일 정도의 시작 지점을 얻을 수 있다.

따옴표와 앞뒤 글자와의 간격

여담으로 예전에 쿽익스프레스를 사용하면서 가장 불만스러웠던 점 중 하나는 따옴표와 앞뒤 글자와의 간격이었다. 유난히 붙어 있는 그것들은 다음 글자의 초성이 ‘ㅂ, ㅁ, ㅍ’일 때 최악의 간격을 보여준다. 그럴 때마다 보이는 족족 간격을 조정하곤 했는데, 매번 볼 때마다 그 기준이 달라져서 속이 타는 느낌으로 그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어느 정도 개선된 프로그램 성능 때문에 그 수고를 덜지만 초성마다 달라지는 간격을 소화하기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 게다가 같은 문단에서 글꼴이 변경된다 싶으면 경우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스타일을 지정한다는 것은 확인 과정만으로 엄청난 시간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감각으로 판단하는 게 오히려 정신 건강에 좋다.

괄호 조정

다음은 괄호다. 괄호의 종류도 여러 가지라서 일일이 그것들에 대한 조정을 나열하지 않고 기본적인 ‘( )’에 대한 조정만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한글 글꼴과 알파벳 글꼴의 그것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내 주위의 몇몇 디자이너들은 한글과 알파벳이 섞인 글(때론 섞이지 않은 한글 단락도 있음)을 다룰 때 문장부호를 알파벳 글꼴로 지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합성글꼴 만들기의 용이함, 포함된 알파벳이나 숫자와의 어울림, 아니면 구두점 내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내 경우엔 글의 주를 이루는 언어에 따라 그것을 선택한다. 구두점의 크기 및 기준선이 두 언어 안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크기와 기준선을 조정한 값을 스타일로 지정할 수 있겠지만 구두점까지 주가 아닌 언어로 바꾸는 게 왠지 사치스럽게 여겨진다. 어쨌든 선택한 글꼴의 괄호는 두 언어의 기준선이 다르기 때문에 앞뒤 문자의 종류에 따라 조정할 수밖에 없다. 또한 주된 언어가 한글일 때 괄호 안에 알파벳이나 숫자만으로 이루어진 단어가 올 경우 시작 괄호와 다음 글자의 간격, 맺음 괄호와 그 앞의 글자와의 간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대쉬, 환점, 쌍점, 반쌍점 등의 부호들

괄호와 함께 ‘대쉬(-), 환점(.), 쌍점(:), 반쌍점(;) 등 세로 중심이 민감한 부호들 또한 기준선 정렬이 중요하다. 특히 쌍점과 반쌍점은 앞 글자와의 간격도 신경 써야 한다. 앞뒤 간격의 조정이 필요한 것 가운데 또 한 가지는 온점(.)을 제외한 마침표들이다. 물음표와 느낌표가 대표적인데, 문장의 형식을 나타내는 이들은 보통 마침표(온점)에 비해 앞 글자와의 간격이 좁아 보인다. 이들의 높이가 글자의 높이만큼을 유지하기 때문일 텐데, 알파벳은 물론 한글도 조정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숫자

숫자 또한 시작 지점의 균일함을 방해하는 요소인데, 그 중에서도 ‘1’은 나머지 숫자와 다른 시작 지점을 갖고 있어서 때에 따라 들여쓰기와 내어쓰기의 조정이 필요하다. 다행히 글꼴 대부분의 ‘1’은 한글의 시작 지점과 동일하게 두어도 어색하지 않아 다른 아홉 개의 숫자만 조정한다면 무리가 없다. 또한 알파벳의 시작 지점에 그 아홉 개의 숫자의 것을 포함시키기도 하는데, 작품의 캡션이나 판권 부분에 주로 적용한다.

캡션에 들어가는 기호들

작품 캡션에는 이 외에도 여러 기호가 들어가곤 하는데, 각각의 크기를 연결시켜주는 ‘×’와 단위를 나타내는 ‘cm, mm’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210 × 197 cm’의 크기를 가정한다면 ‘2’의 시작지점, ‘0’과 ‘×’와 ‘1’의 간격, ‘7’과 ‘cm’의 간격을 조정한다. 단락의 주요 시작 지점을 한글로 둔다면 ‘2’는 약간 들여써야 할 것이고 벌어진 ‘0’과 ‘×’와 ‘1’의 간격은 약간 줄여야 한다. 또한 ‘×’와 ‘1’의 간격은 ‘1’ 앞의 내부 공간 때문에 ‘0’과 ‘×’의 간격보다 더 줄여야 균일한 간격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7’과 ‘cm’의 간격 조정인데, ‘cm’의 해당하는 수치가 앞의 모든 내용이므로 ‘0’과 ‘×’와 ‘1’의 간격보다 더 넓어야 한다.

일일이 이 정도 조정을 진행하고 나면 보통 얼굴이 붉게 변한다. 이럴 때면 간단한 작업으로 쉬어 가는데, 무심코 지나쳤던 띄어쓰기 조정이다. ‘찾기/바꾸기’를 활용해 단어 사이에 있는 두 칸을 고르는 과정이다. 가끔 단락 사이나 표 짜기에 설정해놓은 태그를 망각하고 ‘모두 변경’을 누르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때문에 이 역시 하나하나 확인해가며 한 칸을 삭제하는 편이 안전하다. 두 칸, 때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띄어쓰기가 발견될 때마다 개운한 느낌과 함께 원래의 얼굴빛을 찾을 수 있다.

한글 뒤 간격 조정

다음은 한글 뒤에 띄어쓰기 없이 숫자나 알파벳이 바로 오는 경우의 조정이다. ‘제1회’, ‘중2동’ 정도로 예를 들어보자. 해당 문자에 한글과 알파벳 글꼴을 각각 적용했을 때 두 가지의 조정은 반대로 적용할 수밖에 없다. 글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앞의 경우엔 ‘제’와 ‘1’의 간격이 ‘1’과 ‘회’의 간격보다 넓고, 뒤의 경우엔 ‘중’과 ‘2’ 사이의 간격이 ‘2’와 ‘동’의 그것보다 좁기 때문이다. 앞의 경우엔 숫자와 뒷글자 사이를 넓히고, 뒤의 경우엔 숫자와 앞글자 사이를 넓혀야 한다. 만약 숫자와 알파벳 이외의 부호에도 알파벳 글꼴을 적용했거나 숫자 앞의 문자가 한글꼴 기호가 오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언어끼리의 글줄 간격 조정

같은 글줄이 아닌 다른 글줄에서 다른 언어끼리 줄이 구분된다면, 다른 조정이 필요하다. 보통 주소 및 연락처, 메일과 홈페이지의 주소가 이에 해당하는데, 한글주소 다음 줄에 소문자만으로 구성된 메일과 홈페이지 주소가 이어질 때 확연히 드러난다. 대문자 높이에 해당하는 문자는 ‘@’나 ‘/’ 정도여서 실제 글줄의 높이는 소문자의 x-height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옆 단락의 유무나 내용의 길이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글줄 기준선을 조정한다. 물론 앞서 나열했던 시작 지점의 정렬과 동시에 ‘@’, ‘/’, ‘:’ 앞뒤의 간격 조정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단락끼리의 간격 조정

그렇다면 더 나아가 글줄이 아닌 단락끼리의 조정은 어떠할까?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최적의 단락 사이의 간격이 아닌 동일한 시작지점(Y축)을 갖는 서로 다른 언어가 각기 다른 단락을 구성하고 있을 때의 조정이다. 워크룸은 국영문이 혼용된 도록 작업을 많이 하기 때문에 민감한 부분이다. 같은 크기의 글꼴을 같은 시작 지점(Y축)에서 배열한다 하더라도 보통 알파벳 단락이 한글 단락보다 낮아 보인다. 이것은 일반적인 문단이었을 때, 즉 대문자가 문장의 시작 부분에만 적용되었을 경우를 말하는데, 이 또한 알파벳 단락의 시작 지점을 x-height의 높이부터 인지하기 때문이다. 한글의 시작 지점은 글자마다 달라서 나름대로의 평균값으로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

글자 크기가 다를 때의 단락 높이 조정

단락끼리의 높이 조정을 좀 더 이야기하자면, 같은 언어일지라도 글자의 크기가 다를 경우를 살펴볼 수 있다. 보통 제목과 본문의 글자 크기가 다를 때 필요한데, 글상자의 시작 지점(X축)이 같더라도 작은 글씨 크기의 단락이 앞으로 나와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글씨가 작기 때문에 실제로 앞으로 나와 있다. 이런 경우에는 큰 글씨의 형태에 따라 시작 지점을 조정하는데, 글씨가 작은 본문보다는 제목에 해당하는 글상자를 조정하는 편이 낫다. 재미있는 것은 제목의 첫 글자가 ‘ㅅ’으로 조합된 ‘사’ 같은 것이라면 생각보다 길게 내어쓰기를 해야 한다. 한글보다는 덜하지만 알파벳도 마찬가지이다.

글 상자 조정

만약 큰 글씨로 구성된 각기 다른 언어끼리의 글 상자를 조정할 때면 원칙이라는 건 접어두어야 한다. 보통 제목용에 해당하는 이 경우엔 포함된 알파벳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소문자만으로 이루어진 단어라면 x-height의 시작 지점을 기준으로 한글의 시작지점을 정렬하면 되지만 대문자가 포함된 단어라면 그 양에 따라 정렬지점이 바뀌게 된다.

페이지 번호

마지막으로 페이지 번호가 남았다. 물론 ‘페이지 번호 매기기’를 통해 일정한 장소에 정확하게 수고 없이 마무리할 수 있겠지만, 각 페이지의 레이아웃에 따라 비대칭으로 구성하기 위해 직접 입력하곤 한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 ‘1’의 시작 지점이 나머지 아홉 개 숫자의 시작 지점과 현저하게 다르기 때문에 상단의 이미지 혹은 글단락의 시작 지점과 동일하게 정렬하곤 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 경우엔 수동으로 쪽번호를 입력하는 건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일종의 도리처럼 간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솔직히 지금까지 열거한 정렬의 대부분은 학부에서 타이포그래피 과정을 이수한 디자이너라면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이다. 어쩌면 이런 사사로움보다는 작업 컨셉을 한 번이라도 더 점검하며 큰 그림을 본질에 가깝게 수정하고 완성하는 게 훨씬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별것 아닌 내용을 대단한 것인 양 늘어놓은 이유는 편집 디자이너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은 작업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출력소에 데이터 보내는 시간을 클라이언트에게 조금만 속이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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