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워크룸

어느 편집디자이너의 형식적인 이야기.1_파일 출력 100분 전

글. 이경수(워크룸 디자이너)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입사한 디자인사무실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신입사원이라 특별히 주어진 일이 없음에도 늘 허둥댔던 내게 선배들의 현란한 손놀림은 그 자체만으로도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와 달리 선배들은 항상 여유롭기만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며칠, 아니 몇 주에 걸쳐 완성한 방대한 데이터를 출력소로 넘기기 전, 불과 두어 시간 만에 새로운 디자인으로 탈바꿈시키던 사수의 모습이었다. 거의 100분 정도 걸렸으려나. 출력소(지금은 인쇄소로 직접 보내는 경우도 있음)로 데이터를 보내기 전 100…

편집자치곤 이상한 이야기.2_역할분담

  글. 박활성(워크룸프레스 편집장) 텍스트의 세계는 냉정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가’라고 쓰인 것은 다른 글자가 아닌 ‘가’라고 읽힌다는 뜻이다. 다른 여지는 없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당연한 말이니까. 학교에서 배웠듯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다. 또 한편으로 텍스트의 세계는 한없이 열려 있는 가능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하나의 글자는 다른 글자들과 만나 무한한 의미를 생성해낸다. 편집자와 디자이너(타이포그래퍼)는 이 무한한 의미의 세계에서 일련의 글자들을 제자리…

편집자치곤 이상한 이야기.1_문장부호

  글. 박활성(워크룸프레스 편집장) 2008년이었나,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본 후에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가 메카시의 작품에 호기심이 일었으나 곧이어 국내에 출간된 또 다른 그의 소설 <로드>를 한동안 읽지 못했다. 쏟아지는 찬사와 줄거리를 보아 하니 내가 읽으면 안 되는 종류의 책이겠거니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나, 사람을 기다리러 서점에 들렀다 그 책을 충동구매하고 말았는데 결과는 역시나, 매카시의 묵시록은 무시무시해서 어린 아들을 둔, 가끔 우울증을 겪는 부모…

김형진의 그럴듯한 이야기2_스타일의 운명

글. 김형진(워크룸 공동대표) 트위터에서 멋진 글을 읽었다. 정조 때의 문인 이옥의 시다. 4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四更起掃頭 5경에 시부모님께 문안드리지요. 五更候公姥 맹세한답니다, 장차 집에 돌아간 뒤에는 誓將歸家後 먹지도 않고 한 낮까지 잠만 잘 터예요. 不食眠日午 정조는 이 남자의 글이 싫었다. 그래서 그를 군대에 보내고, 문체를 바꾸겠다는 반성문을 받았다. 이렇게 멋진 시를 썼던 성균관 유생 이옥은 그래서 평생을 벼슬 하나 못하고 어슬렁거리며 살았다. 슬프고 안타까운 얘기다. . 정조가 ‘문체반정’을 …

김형진의 그럴듯한 이야기.1_진짜와의 거리

글. 김형진(워크룸 공동대표) ㆍ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내가 어렸을 적엔 ‘다이제스트판’ 책들이 많았다. <로빈슨 크루소>나 <노인과 바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 같은 세계명작은 물론이고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 따위의 유사철학서들, 심지어 (누가 썼는지 확인할 수도 없는) 맥아더니, 슈바이처니하는 ‘위인’들의 전기들도 죄다 다이제스트판으로 나와 있었다. ‘다이제스트판’이 뭔지 알 턱이 없던 나는 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