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디자이너.1_<디자인과 진실> 외

 

“당신이 알고 있던 디자인 개념을 확장해 드립니다.”

‘사랑과 진실’ 아니면 ‘불편한 진실’ 정도가 익숙한 나에게 검은색 표지에 쓰여진 <디자인과 진실>은 다소 생소하고 어렵게 다가왔다. 왜 디자인과 진실일까? 진실한 마음으로 디자인을 해야 디자인을 잘 할 수 있다는 얘긴가?

책은 생각보다 쉽게 잘 읽혔다. 미국의 인문학자 로버트 그루딘(Robert Grudin)은 디자인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디자인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에게도 디자인을 보는 시각을 깊고 풍부하게 해줄 다양한 사례와 해석을 들려준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유명한 작업을 나름 좋은 작업이라고 생각해왔던 순진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디자인이 단지 꾸미고 장식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삼성과 오세훈 전 서울시장 덕분에 디자인은 경쟁력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디자인은 비즈니스에서 큰 경쟁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은 디자인은 진실이요 자유라고 말한다. 인문학이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에, 인문학자의 넋두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디자인이 경쟁력이라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도 이 책을 읽으며 생각의 폭을 넓혔으니 주위 사람들에게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디자인과 진실>은 겉치장에만 열을 올리고 본질을 외면한 디자인이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지 이야기한다. 책에 소개된 ‘디자인 비극’의 사례는 다양하다. 세계무역센터, 르네상스 시대의 휘황찬란한 성당, 1950년대 후반 포드 엣셀 자동차까지 인간이 디자인한 수많은 인공물이 실제의 기능을 넘어서 과잉된 메시지를 표방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흥미롭게 제시하고 있다.

잘못된 디자인은 권력의 남용이 반영된 것이라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좋은 디자인이 진실을 말한다면 나쁜 디자인은 거짓을 말한다.” 좋은 디자인은 정직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세상과 호흡하도록 해주고, 나쁜 디자인은 속임수에 가까운 착취적 생산전략을 보인다. 나쁜 디자인의 거짓말은 어떤 식으로든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권선징악(勸善懲惡)과 자연의 섭리를 이야기하지만 진부하거나 공허하지 않게 다가온다. 책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정신이 ‘불편한 진실’보다는 ‘편리한 환상’을 선호한다는 것은 타고난 창의성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각각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디자인을 진지하게 끌어내는 능력, 훈련을 통해 완성되어가는 능력, 스스로의 의지로 자유로워지는 능력이 바로 우리 모두가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창의성이다.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는 디자이너가 살고 있다. 문제는 그 디자이너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이다.” – 306쪽

저자의 결론은 세상 사람 모두가 효과적인 디자인을 모색하는 디자이너라는 데에 이른다. 디자인이라는 행위가 지닌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고, 자기창조의 디자인으로 삶의 지평을 넓히고 자유를 찾는 것이다. 나의 삶은 매 순간 내가 디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과잉디자인으로 스스로를 낭비하지 말고, 진실한 마음으로 현명하게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처음에 가졌던 내 생각이 맞았다. 진실한 마음으로 디자인을 해야 디자인을 잘 할 수 있다. 하지만 디자인 개념이 달랐다. 단지 ‘작업으로서의 디자인’만이 아닌 ‘생활로서의 디자인’인 것이다.

글. 땡스북스 이기섭 대표

저자ㅣ로버트 그루딘 Robert Grudin
오리건 대학(University of Oregon) 영문학과의 명예교수이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버클리 대학에서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저서 《책 – 한편의 소설(Book: A Novel)》로 퓰리처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 밖의 저서로 《시간, 그리고 삶의 기술(Time and the Art of Living)》, 《굉장한 여행(The Most Amazing Thing)》, 《추한 미국(American Vulgar)》, 《걸작의 미덕(The Grace of Great Things)》, 《대화에 관하여(On Dialogue)》 등이 있다.

역자ㅣ제현주
KAIST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디자인 경영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경영컨설팅업체 맥킨지(MCKINSEY), 투 자은행 크레딧스위스(CREDIT SUISSE), 사모펀드운용사 칼라일(CARLYLE)에서 근무하며 기업 경영 및 M&A, 투자 분야의 경력을 쌓았다. 지금은 좋은 책을 번역하며 인문 및 사회과학 공부와 글쓰기에 힘 쏟고 있다. 직업으로 ‘나’를 규정하는 삶에서 벗어나 노동과 유희의 경계를 지우며 사는 삶을 꿈꾸고 있다. 옮긴 책으로 《더 나은 세계화를 말하다》, 《경제학의 배신》 등이 있다.



어렵고도 긴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 속 시대는 격변하고 그 때마다 연루된 이들이 쏟아지는데 그들 개개인도 한 번씩은 짚고 넘어가야 이야기가 풀린다. 이야기는 시작점과 끝이 명확한 일직선이 아니라, 구의 형태 같아 어디서부터 콕 집어내 시작해야 할 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우주적인 스케일의 이야기다.

미술이 무엇이냐는 단말마의 물음에 답하려면, 나는 그렇게 우주를 한 바퀴 돌고 와야 할 것 같다. 그런 장대한 서사의 서막은 대게 원점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게 보통이다. 그것이 미술에 관한 이야기라면 여지없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Venus of Willendorf)다. 비너스에 대한 나의 감흥은, 미술사 혹은 미학 책의 첫 페이지에 대한 일종의 기시감(deja vu, 旣視感)같은 것, 그 첫 페이지에 서린 얼마 가지 않았던 교양에 대한 굳센 다짐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긴 미술사를 다 완주하였다 하더라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기에 작품들은 저마다의 세계가 너무나 광대했고, 이해와 해석의 여지를 좀체 주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비평마저도 불친절했기에, 내게 미술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부유(float)했다. 그래서 나는 정서만큼은 확실하다 싶은 인상파 미술을 옹호하게 되었고,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철학서였다면 더 명쾌했을 논리를 구태여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의 자기만족과 자위라고 냉대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치기의 시절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 책의 어조는 명쾌하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대번에 ‘1 미술이란 무엇인가?’로 시작한다. 그에 대한 답이 “미술은 각자가 보기 나름이다”라든지 “미술은 똥이다”라든지 “미술은 태초에 주술적인 목적에 근거하여 선사시대 동굴 같은 것이었다”라고 말했다면 실망할 뻔했다. 그러나 저자는 아래와 같이 반문하면서 시작한다.

내가 이 작품은 미술이 아니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 2쪽

저자는 미켈란 젤로의 <아담의 창조>를 미술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책을 시작한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도 미술이 아니고, 베르사유 궁전도 아니고, 니케 상도 아니고. 페이지를 넘길 때 마다 걸작이라 칭송 받아온 (받고 있는) 작품들을 열거하며 이것은 미술이 아니라고 기존 통념에 부정을 반복한다. 부정하는 목소리의 리듬감은 경쾌하다. ‘아니다’의 리듬은 다시 모나리자에서 뒤샹의 <L.H.O.O.Q>로 넘어가면서 ‘이것은 미술이다’의 리듬으로 바뀐다.

페이지마다 한 문장으로만 써있던 저자의 목소리는 걸작에 미술이다/아니다 라고 평가하며 자연히 위용을 얻게 된다. 그것이 현대 미술의 상징인 뒤샹의 <샘>과 만나는 페이지에 이르면 마치 슈퍼스타의 등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 부분이 미술강의를 책으로 옮겨온 이 책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지점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드는 작은 기대감과 단호하게 들리는 저자의 목소리는 책에 상당한 생동감을 준다.

미술은 근대, 지난 200년간의 발명품이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나타난 개념이다. 미술관에 전시되고 박물관에 보존되며 수집가들이 구매하고 대중매체 내에서 복제되는 그 무엇을 말한다. 미술가가 미술작품을 창조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소용이나 가치가 없고 미술의 여러 제도(화랑이나 미술사, 미술출판, 박물관 등) 안에서 순환하면서 비로소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미술에 관한 정의 중에 내가 만난 가장 건조하고 여운 없고 과학적인 정의다. 시대착오적인 대학 강의를 보다 지적이고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 문화에 대한 고루한 편견과 신화를 효과적으로 해체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니, 그곳에 명쾌함의 이유가 있겠구나 싶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다양한 제도들에 의해 형성되고 정의된다. 제도는 사물들의 경계와 관행을 설정해준다. 이는 액자틀이 그 안에 있는 것을 회화로 보이게 만들고, 좌대가 그 위에 있는 것을 조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과 같다. – 28쪽

책의 원제는 <BELIEVING IS SEEING>. 직역하면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양한 제도들로 형성되고 정의되어 있다.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들, 그것들을 바탕으로 인식하는 것, 보는 것, 다시 보았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들은 전부 그러한 제도들과 기호와 상징체계들을 근간으로 한다. 그것을 미술의 세계로 축소해 본다면 더 확실해진다.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미술이 그 개념을 확실하게 응집시키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기호와 프레임이 작동되어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것들과 격리시켜 또 다른/새로운 기호를 생산하는 일이 그렇고, 그런 작품을 미술로서 보는 눈 역시 그렇고, 갤러리라는 프레임,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담론들이 미술을 미술이게 한다. 미술이 미술 자체이기 때문에 미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근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미술이 된다. 그 동안에는 이 사이의 작용들을 보지 못하고 생략하고, “미술은 ( ?) 미술이다”라는 식으로 미술을 보려 했기 때문에 내게 미술은 단단한 개념 없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런 시선과 오랜 편견이 미술을 어려운 것으로 만들고 궁극에는 미술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사람이 자기 자신, 자신의 현실, 자신의 문화와 맺는 중재된 관계는 아마도 미술을 살펴보면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36쪽

사람은 자신이 사는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코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지난 시대의 산물을 당시의 상징으로 읽지 못하고 내가 사는 시대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은 내 노력과는 별개의 일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중에 그런 오류들 역시 시대의 특수성과 편견이 주는 즐거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스펙터클을 구실로 만들어진 프레스코 벽화를 위대한 미술작품이라고 보는 오류처럼 말이다.

어찌됐건 현실계를 초월하거나 열반에 이르지 않는 이상 죽을 때까지 사람은 동시대의 기호와 상징, 프레임을 자신의 눈으로 여긴 채 세계를 보게 된다. 믿음이 곧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는 게 더 많으면 좋겠다. 아는 것이 더 많아지면, 나는 더 많은 것을 보고 기뻐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이라는 공기 속에선 쉽게 보이지 않는 예민한 것들을 예술에서 ‘보기’ 위해서 아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는 건강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은 좋은 입문서다.

글. 땡스북스 류가은

저자ㅣ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Mary Anne Staniszewski)
미술사가로서 미국 렌셀러 폴리테크닉 대학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의 전자예술사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The Power of Display: A History of Exhibition Installations at the Museum of Modern Art》(1998), 《Dennis Adams: The Architecture of Amnesia》(1990) 등이 있으며, 주로 근현대 미술과 문화에 관한 탁월한 저술가로 정평이 나 있다

역자ㅣ박이소
이 책을 번역한 박이소는 홍익대학교와 미국 프랫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미국에서 ‘박모’라는 이름으로 33회의 크고 작은 전시에 참여했으며, 대안공간인 ‘마이너 인저리 Minor Injury’를 운영하기도 했다. 1994년 귀국해 SADI 교수를 역임했으며, 1997년 광주비엔날레와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2004년 부산비엔날레 참여작가로 활동했다. 2001년에는 대안공간 ‘풀’ 개인전과 2002년 에르메스상 수상기념전 등을 가졌다. 국내외에서 한창 주목을 받고 있던 2004년에 작고했다. 번역서로는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외에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존 스토리 지음, 현실문화연구, 1999)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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