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치곤 이상한 이야기.2_역할분담

 

글. 박활성(워크룸프레스 편집장)

텍스트의 세계는 냉정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가’라고 쓰인 것은 다른 글자가 아닌 ‘가’라고 읽힌다는 뜻이다. 다른 여지는 없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당연한 말이니까. 학교에서 배웠듯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다. 또 한편으로 텍스트의 세계는 한없이 열려 있는 가능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하나의 글자는 다른 글자들과 만나 무한한 의미를 생성해낸다. 편집자와 디자이너(타이포그래퍼)는 이 무한한 의미의 세계에서 일련의 글자들을 제자리에 놓고 거기에 알맞은 옷을 입히기 위해 고심하는 존재이다. 

자, 지난 글에 이어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애매모호한 역할 분담 내지는 갈등, 혹은 입장 차이에 대해 살펴보자.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역할은 생각보다 많이 분리되어 있고, 그보다 더 많은 부분이 겹치기도 한다. 그나마 역할 분담을 해본다면 글자를 자리에 맞게 놓는 것은 편집자 쪽에 치우쳐 있고 옷을 입히는 것은 디자이너의 영역에 기울어 있을 텐데, 자리와 옷은 서로 영향을 주기 마련이라 자연히 문제들이 생긴다. 그 중 오늘 이야기해볼 것은 ‘줄바꿈’에 대한 이야기다. 

앞서 이야기했듯 하나의 글자는 그 자체로는 별다른 의미를 생성해내지 못한다. 다른 글자와 결합해야 한다. 그런데 구텐베르크 이래 현재까지 적어도 종이책에서는 (그리고 현실적으로 엄연히 인터넷상에서도) 지면(혹은 화면)상의 한계로 줄바꿈이라는 게 필요하게 된다. 즉 어디서 텍스트를 끊고 줄을 바꿔주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게 무슨 문제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냥 종이가(화면이) 끝나는 데서 줄을 바꿔주면 되지. 하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편집자나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굉장히 현실적인 문제다. 

물론 아주 오래 전에는 이게 문제가 아닐 수 있었다. 주어진 조건에 충실하면 되니까. 네모난 틀에 차가운 활자를 채워 넣어야 하던 시절에는 어디서 텍스트를 끊어야 하냐는 문제로 고민하는 건 호사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적인 제약이 월등히 자유로워진 오늘날에도 줄바꿈의 문제는 가독성 문제와 더불어 정답이 없는 차가운 감자에 속한다.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우리 사무실만 해도 처음 일을 맡기는 클라이언트의 (적게 잡아서) 과반수 이상은 여전히 오른쪽 흘리기로 텍스트를 정렬했을 때 한 번씩 의문을 표한다. 특히 단행본 본문을 디자인할 때는 태클이 들어오는 게 정상이다. 처음에는 “이거 이렇게 정렬한 이유가 있나요?”라는 정도로 조심스레 시작하지만, 어떤 말을 늘어놓든 이내 “그냥 양쪽 정렬로 하면 안 될까요?”라는 말로 넘어가는 게 정해진 수순이다. 

어디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먼저 텍스트의 정렬 방식을 결정하는 사람은 편집자일까, 디자이너일까? 원칙적으로 그것은 텍스트의 의미에는 심각한 영향을 주지 않는 시각적 형태, 즉 타이포그래피 영역에 속하므로 디자이너의 관할지에 좀 더 가깝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것은 원칙일 뿐이고, 줄바꿈은 엄연히 텍스트의 의미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편집자가 가만있을 수는 없다. 또한 여타 타이포그래피 영역 중에서도 본문 타이포그래피는 전통적으로 편집자의 입김이 많이 작용하는 편이라서, 솔직히 디자이너가 오른쪽 흘리기에 확고한 믿음이 없는 이상 편집자의 의견이 반영되기 쉽다. 세상에 꼭 오른쪽 흘리기로 조판되어야 하는 단행본 본문이란 찾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면 오른쪽 흘리기를 선호하는 디자이너들은 왜 오른쪽 흘리기를 선호할까? 사실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꽤나 논리적인 나름의 이유를 댈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오른쪽 흘리기를 하면 훨씬 고른 자간을 유지할 수 있다. 양쪽 정렬처럼 글줄에 따라 보기 싫게 벌어지는 자간을 억지로 마이너스 자간을 먹여가며 무리하게 조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 의미 단위별로 줄바꿈을 할 수 있으므로 단어나 조사 등이 쪼개져서 다음 줄로 넘어가는 일을 피할 수 있다. 텍스트들의 오른쪽 경계가 이루는 리듬감 있는 형태 역시 디자이너에게 매력적인 요소일 것이다. 

일찍이 1920년대 피트 즈바르트(Piet Zwart)는 헤이그에 있는 트리오 인쇄소를 위한 안내서에 실린 「낡은 타이포그래피에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로」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는 왼쪽 끝에 텍스트를 정렬시키고 끝나는 지점은 글줄의 길이에 맡기거나 혹은 일부러 줄을 바꿔 텍스트 내에 일종의 긴장감을 유도한다.” 이 밖에도 오른쪽 흘리기를 옹호하는 근거나 주장들은 멀리는 20세기 전반 새로운 타이포그래퍼들의 글부터 스위스 타이포그래피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오해하기 쉬운 사실로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의 대명사 얀 치홀트(Jan Tschihold)는 ‘모더니스트’로 활동하던 동안 어떤 작업에서도, 심지어 광고에서도 일부러 이런 방식으로 활자를 조판하지 않았다. 그가 옹호한 것은 비대칭이지 오른쪽 흘리기가 아니다.) 

그에 대한 반론들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그 이야기들을 주구장창 늘어놓을 생각은 없고, 편집자치고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은 앞서 든 세 가지 근거 중 두 번째에 대한 것이다. 편집자들은 대개 텍스트의 의미 단위가 ‘디자인’이라는 행위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양끝 정렬을 선호한다는 것은 왠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오른쪽 흘리기로 텍스트를 정렬하면 의미를 이루는 한 단위가 끊어지지 않고 온전히 붙어 있을 수 있는데, 왜 그걸 낯설어할까? 써놓고 보니 자문자답을 한 셈이다. 한마디로 낯설어서 그렇다. 

요즘에는 그나마 오른쪽 흘리기로 된 책들이 간혹 눈에 띄지만 그래도 집에 있는 책을 아무 책이나 한번 펼쳐보면, 잡지나 시집 같은 걸 빼고 아마 99퍼센트의 단행본은 양쪽 정렬로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우리가 양쪽 정렬에 익숙해진 것은 아니다. 5~6세까지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들을 살펴보면 반대로 거의 90퍼센트 이상의 책들이 오른쪽 흘리기, 혹은 왼쪽 흘리기나 가운데 정렬로 되어 있지 양쪽 정렬로 되어 있는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유는 간단하다. 판형이 크고 문장들이 짧아서 줄바꿈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오른쪽 흘리기가 되니 가끔 등장하는 긴 문장들도 그에 맞춰서 정렬하면 된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거의 모든 책들이 양쪽 정렬로 조판되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양끝 정렬에 길들여진다. 이거 참. 

그런데 낯선 게 편집자에게 왜 문제가 될까? 낯설다고 해서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고, 더군다나 실제로 독자들은 양끝 정렬이든 오른쪽 흘리기든 잘도 읽을 텐데 말이다. 아마 모두 그렇진 않더라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럴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더라도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그런 건 독서에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조악한 인터넷 타이포그래피 환경마저 잘도 견뎌내는 사람들이니까. 그렇다면 의미 단위가 끊어지지 않는 오른쪽 흘리기가 더 낫지 않을까? 그런데 솔직히 이런 말 하면 같은 사무실에 있는 디자이너들이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나만 해도 단행본 편집을 할 때 양쪽 정렬을 선호한다. 그게 왠지 맘이 놓이고 교정을 보고 난 후에도 뒷맛이 개운하다. 

왜 그럴까? 그게 아무래도 익숙해서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든 아니든 가독성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양끝 정렬이 텍스트에게 굉장히 폭력적이고 인위적인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오른쪽 흘리기가 더 인위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즉 디자인이 ‘개입’된 것 같기 때문이다. 디자인을 하겠다는 디자이너의 의지, 혹은 태도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낌새가 낯선 느낌과 결합해 심리적 거부감을 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건 편집자들의 텍스트에 대한 욕망이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다루는 텍스트를 온전히 내 손 안에서 통제하고 싶은 욕망. 이상하게도 도록이니 리플렛이니 이런 것들은 다 괜찮은데 단행본일 경우에는 오른쪽 흘리기로 되어 있으면 내가 텍스트를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이 엷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덧붙이자면 그렇다고 텍스트에 대한 장악력이 온전히 디자이너에게 넘어가지도 않은 어정쩡한 느낌. 

그리하여 나는 앞서 오른쪽 흘리기를 옹호하는 세 가지 이유를 똑같이 들어 양쪽 정렬을 주장하곤 한다. 즉 고른 자간을 유지하면서, 형식적인 단어별 줄바꿈 말고 진정한 의미의 의미 단위별 줄바꿈을 실현함과 동시에, 텍스트의 오른쪽 경계선이 이루는 시각적 리듬감 역시 아름다운 오른쪽 흘리기가 아닌 다음에야 양쪽 정렬이 더 좋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테크놀로지가 발달했다 하더라도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아름다운 한글 오른쪽 흘리기를 하려면 말 그대로 ‘엄청난’ 노가다가 필요하다. 똑똑한 척만 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맡겨놔서는 오른쪽 흘리기의 장점을 운운하며 편집자를 설득하는 건 무리인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개인 작업이 아닌 다음에야 바쁘게 돌아가는 실무에서, 그것도 긴 텍스트에서 이걸 실현할 수 있는 편집 디자이너는 우리나라에서 다섯 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건, 단행본에 있어서는 양쪽 정렬이 더 좋다고 실컷 말해놓고도 정작 워크룸 프레스에서 출간하는 책들은 거의 대부분 오른쪽 흘리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표리부동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까? 어쩌면 그건 텍스트의 냉정함이 때로는 싫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편집은, 그리고 디자인은 텍스트를 통제할 수 없고 우리가 텍스트에게 남길 수 있는 것은 그저 흔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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