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나라 디자인 이야기.1_무사시노미술대학 활판인쇄 공방

글. 박지훈(무사시노미술대학, 일본)

2012년 4월 무사시노 미술대학 시각전달디자인학과의 1학년 타이포그래피 수업에는 작업복 차림의 학생들이 활자 조판 테이블 앞에서 분주하다. 쾨쾨한 먼지냄새, 잉크냄새와 삐거덕거리는 기계 소리가 공방에 들어서는 순간 오랜 시간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0세기 초,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광경이다. 학생들은 저마다 자신이 의도로하는 스케치를 들고는 활자와 스페이스의 납조각을 조판하느라 정신이 없다.

활판인쇄 실습 풍경

타이포그래피 수업의 기초과정으로 활판인쇄를 실습하는 내용은 매우 심플하다. 여러 패턴으로 자간을 설정해가며 자신의 이름을 조판 인쇄하는 것. 조판 후 인쇄기에 세팅하여 찍어내고 빨간 펜으로 자간을 체크하여 조판을 수정, 또다시 세팅, 인쇄, 수정하는 공정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컴퓨터를 사용하면 몇 분도 걸리지 않을 작업을 3주간에 걸쳐 활자와 씨름하는 과정으로 디자이너 지망생들의 문자 컨드롤이 시작된다. 컴퓨터 사용은 한참 이후의 작업이다.

기초적인 활자 조판을 연습하고 있는 학생

종이 매체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는 오늘날, 활판인쇄의 공정을 커리큘럼으로 채용하여 성적으로 반영하는 교육기관도 흔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과거 문자 미디어의 체험이라는 단순한 명목 외에 또 다른 기대 목적이 있다. 과거 디자이너와 타이포그래퍼는 명확히 역할이 나뉘어있던 분야였으나, 컴퓨터 등 새로운 작업환경의 등장으로 그 구분이 점차 일치화 되어왔다. 이러한 환경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는 오늘날인 만큼 기초적인 활자 조판의 연습이 중요시된다는 것이 본 수업의 취지이다. 또한, 활자 사이에 스페이스 활자를 직접 끼워 넣으며 자간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문자 컨트롤과 가독성의 관계라는 기초감각을 손수 터득하게 한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공간의 컨트롤을 연습하는 과정에서는 문자사이즈의 배율관계 또한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자간 조판시 사용되는 스페이스 칩, 유니버스 폰트, 가라몬드 폰트(아래)생

활판인쇄 실습은 로마 문자의 산세리프 활자로부터 시작된다. 문자를 컨트롤함에 있어 자간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려는 의도가 크다. 이후 수업은 시각적 요소가 많은 세리프체의 컨트롤 순으로 이루어진다. 활판인쇄 공방에는 한자와 가나 활자도 대량 구비되어 있으며 소량이긴 하지만 한글 명조체 활자도 찾아볼 수 있다.

1학년 타이포그래피 기초수업에서 활자 사용을 경험한 학생들은 2, 3학년 과정의 과제, 개인 작품 및 졸업작품 제작 등에도 활판인쇄를 활용하곤 한다. 최근에는 자신의 명함을 제작하거나 개인 전시의 안내장, 연말연시의 연하장 등을 제작하는 학생들도 자주 볼 수 있다. 인압을 가해서 눌러 찍어낸 명확한 검정이 일반 옵셋에서 느낄 수 없는 정보의 무게감, 진지함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 이곳 학생들의 의견이다.

유니버스 폰트, 가라몬드 폰트, 영문 활자, 한자 활자, 한글 명조체 활자

수업에서 사용하는 인쇄기는 미국의 레터 프레스 프린터(Letterpress Printer)인 Vandercook이라는 기계를 사용하고 있는데, 학생들이 직접 조작하기에는 다소 조작법이 어려운 부분이 있어 주로 수업시간에 사용된다. 이미 부속품조차 찾기 어려운 골동품이지만 매년 수 차례에 걸친 점검과 정비 덕분에 아직도 두 대가 현역으로 문제 없이 움직인다.

Vandercook Press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인쇄기는 Adana라 불리는 소형 수동인쇄기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엽서 사이즈의 소형 인쇄물에 주로 사용되지만 직접 롤러를 설치하고 잉크의 양, 인압 등을 손쉽게 조절할 수 있어 학생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으며, 활자 조판의 레이아웃에 따라서는 A4 사이즈까지도 인쇄할 수 있다는 점이 인기의 비결이다. 인쇄공방의 한 구석에는 옛 유럽의 삽화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프레스식 수동인쇄기가 한 대 녹슬어가고 있는데, 언젠가 학생들과 함께 이 기계를 되살려내려는 계획을 하고 있다. 활판인쇄 시스템의 기본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공부모임이 될 것 같다.

Adana Printing Press

회생을 기다리고 있는 프레스식 수동인쇄기

이미 사라진 미디어로 인식되는 활판 인쇄가 아직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보관, 관리의 문제를 넘어 일본 사회가 갖는 성격과도 관계한다고 본다. 실제로 활자를 제작 판매하고 있는 장인회사가 아직도 여러 곳에서 대를 잇고 있으며, 활판 기술을 이어받아 인쇄소를 운영하는 젊은 인쇄공들이 여전히 활판술의 맥을 잇고 있다. 물론 유지라고 해도 ‘매체’라는 수식어가 어색할 만큼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상황이지만, 국내에서는 이조차도 찾기 어려운 실정이라, 한편으로는 약간 부러운 감정을 느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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