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으로 아름다운-2 : <자연사>

연재 ‘사적으로 아름다운’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책 중에 조금 더 필자 개인에게 아름답게 다가오는 책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사적으로 아름다운 – 2 : <자연사>
자끄 드뉘망 지음, 울리포프레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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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편에서 이야기한 <시청각문서 1-[80]>의 표지가 백색 바탕 위에 문자만으로 세운 구조물이라면, <자연사>의 표지는 먹색 바탕 위에 문자가 물러날 수 있는 끝까지 가보려 한다. 검정 종이 위 출판사명(울리포프레스), 제목(자연사), 저자명(자끄 드뉘망)이 먹1도로 인쇄되어 있다. ‘검정’이라는 단어를 기준으로 할 때 검정 바탕 위 검은 글자는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읽히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종이의 검정을 만들어낸 잉크의 농도와 글자의 검정을 만들어낸 그것이 달라 <자연사>의 표지 텍스트는 ‘문자의 흔적’처럼 표기된다.

유년기 학교에서 붓글씨 연습을 위해 벼루에 먹을 갈던 때를 떠올려 본다. 검은 돌 위에 물을 담고 또 작고 검은 먹을 갈아 글을 쓰기 위한 색을 만들 때, 그 광경은 아직 활자로 활성화되지 않은 비석의 상태였다. 검은색을 붓에 묻혀 흰 종이에 쓸 때 비로소 인식 가능한 형태를 갖추는데 <자연사>의 표지는 이 쉬운 형태를 따르지 않고 어렵고 어둡게 최소화된 양각으로 형태를 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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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읽기 위해 독자는 책을 쥐고 이리저리 각도를 달리해 보게 되는데, 생각해보면, 어떤 집중과 행동이 필요하게끔 최대한 뒤로 물러나는 표지가 얼마나 되던가. 더 덜 읽히려는 표지. 글씨는 하단으로 내려갈수록 점차 해체, 무너진다. 이 표지 디자인은 검정 위 검정 글자로 모자라, 그렇게 쓰인 텍스트마저 허무는 방향으로 물러난다. 하단부에 결국 자음만 남은 ‘자연사’의 ‘ᄌ’과 ‘자끄 드뉘망’의 ‘ᄌ’은 영(0) 직전의 모습만 보여준다. 온라인서점 썸네일 크기에서도 인식 가능하도록 확대와 효과를 거듭하는 서체와 표지 디자인이 2016년 출판의 어떤 극단에 있다면, <자연사>의 표지는 그 반대 지점에 ‘불분명해서 유일한‘ 태도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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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의 작가 소개문과 표3의 출판사 소개문도 마찬가지다. 백색 종이 위에 투명/백색을 실크스크린으로 넣든, 먹색 종이 위에 먹색 인쇄를 하든, 금색 종이 위에 금박을 앉히든, 어떤 방식이든 하나의 기술일 뿐이다. 디자이너의 능력은 ‘어떤 기술을 어떤 맥락으로 어떤 곳에 사용할 것인가’ 민첩하게 판단하는 감각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기술을 목록화하고 이를 어떤 내용이 따라오든 무관하게 입력, 적용한다면 시각적으로 ‘압도적이기만 한’ 작업이 탄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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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완 디자이너는 무용한 책을 만드는 출판사에서 발행한, ‘첫 시를 쓰는 순간 스스로 사망 선고’를 내린 시인이 쓴 <자연사>라는 시집, 3중의 죽음으로 중첩된 시집을 아름다운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 책은 디자이너로 인해 4중의 죽음을 획득한다. 그리고 나는 독자에 의해 자주 읽히고 긁혀 끝내 표지의 글씨들이 완전히 사라져 앞표지와 뒤표지의 구분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을 생각한다. 그때 이 표지는 비로소 완전해질 것이다.

 


<글 : 이로(유어마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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