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으로 아름다운-1 : <시청각 문서 1-[80]>

연재 ‘사적으로 아름다운’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책 중에 조금 더 필자 개인에게 아름답게 다가오는 책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사적으로 아름다운 – 1 : <시청각 문서 1-[80]>
현시원 외 지음, 시청각, 2015

 

<시청각 문서 1-[80]>는 종로의 전시장 시청각에서 그간 ‘시청각 문서’라는 이름으로 각각 발행했던 문서를 모은 책이다. 이 책에서 우선 주요한 것은 페이지 넘버다. 총 17가지 글을 엮은 80쪽의 책에서 ‘쪽’이 그토록 두드러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글을 끝까지 이어가려면 이 책을 조금 더 자세히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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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표지를 본다. 작가와 해당 페이지, 제목이 먼저 보인다. 이 책의 제목은 두 번째 페이지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그것은 ‘무엇이 더 앞설 것인가’의 판단에 따른 것처럼 보인다. 각 낱장의 문서가 먼저였고, 서적이 다음이다. 그때 전체 제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의 구성이다. 문패보다 뼈대를 먼저 보아야 하는 건축물이다. 그 뼈대에서 바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우측 대괄호에 포함된 숫자들, 그리고 하단의 영문 소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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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넘겨 보면 작은 미스터리가 곧 풀리는데, 대괄호는 책 전체에서 하나의 규칙에 따라 사용된다. 텍스트가 전혀 없는, 공백의 페이지에 대괄호와 그 쪽수가 표기된다. 그리고 로마자는 본문 80쪽을 제외한 앞뒤 8쪽의 순서를 표기하는 데 쓰였다. 처음 이 두 가지 요소를 인식하고 나서, 대단히 재밌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그 어떤 ‘면’도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백색의 종이와 1도의 먹색 글자들이 이 책의 전부다. (가느다란 선은 두 번 쓰였다.) 그러니까 <시청각 문서 1-[80]>에서 책의 바깥(표지와 뒤표지)을 안(본문)과 구분케하는 요소는 전통적인 ‘제목과 이미지, 색상’, 다시 말하면 ‘표지로 규정된 표지’가 아니라 작고 특수한 약속(로마자 숫자)이다. 이 책을 디자인한 홍은주, 김형재 디자이너는 책에 수록된 원고를 독립된 문서일 수 있도록 설정한다. 책등을 감싸지 않은 사철제본 역시 문서를 그저 ‘엮기만’ 하려는 디자인 전체 방향에 가장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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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전부 읽은 뒤 다시 제목으로 돌아오면 ‘1-[80]’ 부분이 특수하게 다가온다. 문자가 표기된 페이지에서 시작하여 공백의 페이지로 끝난 것이다. 그것은 “기록한다는 것은 하찮은 일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 서문이나 “시청각 문서는 문서로서는 이미 실패한 시도”라는 전시 서문과도 맞물린다. 그런데 그 공백은 허망하게 비어있지 않다. 공백 역시 자신만의 규칙을 세워 공백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동안 우리는 현란한 색과 그래픽, 이미지를 채워서 끝내 서로의 멋을 잡아먹고 있는 책들을 본 기억이 있다. 이 책의 디자인은 문서를 문서로 배려하면서 동시에 책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인다. (과장을 조금 섞어서) 각 페이지가 글자가 새겨진 무척 얇은 돌판을 포개어 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낱장에 질서와 무게를 부여할 수 있는 힘이다. 아름다운 디자인이자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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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로(유어마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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