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실 캘리그라피.3_다양한 붓과 도구들이 표현한 글꼴
글. 왕은실 작가(캘리그라퍼)
이번 칼럼에서는 다양한 도구들을 이용한 글씨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붓에는 종류가 굉장히 많습니다. 양털, 닭털, 말털, 족제비털, 곰털, 수달털, 토끼털 등 다양한 털의 붓이 있습니다. 글자는 사용하는 붓털 길이와 크기에 따라 질감이 달라지지만, 붓 크기에 따른 글씨 면적이 가장 크게 변화하는데요. 막상 글자를 다양하게 쓰려면 초보자에게는 붓만 가지고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우리 주변에 있는 흔한 도구들을 이용해 화선지 위에 쓰면 어떠한 글자들이 나오는지 하나씩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면봉
첫 번째 주인공은 목욕탕 또는 화장대 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면봉입니다. 이 면봉에 먹물을 묻혀 화선지(연습지)에 써보도록 해보죠. 아래 글씨는 썼다기 보다 찍어서 글자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데, 면봉은 끝이 동그랗기 때문에 그 특성을 살리기 위해 한 점씩 찍어서 ‘면봉’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왜 쓰지 않고 만들었을까요? 쓰기도 하지만 다양한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는 만들기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습니다. 획을 쓰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선부터 글꼴의 구성이 중요하지만, 쉽게 시작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렇게 실험한 질감으로 연상되는 단어를 찾아 연결해 쓰면 그 글자의 느낌을 한층 더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면봉’이라는 글자를 써보고 연상된 단어 ‘사탕’을 다양한 먹색으로 써보았습니다. 검정색이 사탕 느낌을 주지 않는다면 포토샵을 활용하여 색을 보정할 수도 있습니다.
2. 빨대
음료수를 마실 때 사용하고 남은 빨대들을 활용할 수도 있는데요. 먹물을 묻히기도 공기압으로 먹물을 머금으면서 써보았습니다. 아무래도 검정색만으로 쓰기에는 어두운 느낌을 많이 주기 때문에 저는 물을 먼저 머금었습니다. 빨대 끝 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막았다 놓았다 하면서 물을 머금고, 다음에 먹물을 조금 섞어 머금은 후에 화선지에 빨대 끝에 있는 엄지손가락으로 물을 조절하여 글씨를 쓸 수 있습니다. 한번 머금은 먹물은 금방 빠지기 때문에 두 글자를 쓰는 동안 서너 번은 위와 같은 방법을 반복해야 합니다. 먹물과 물의 양에 따라 먹 색이 다양하게 표현되며 우연성도 함께 동반되기 때문에 재미있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죠.
빨대를 활용해 풍선도 그려보았는데요. 글씨도 쓰지만 강략을 특별히 주지 않아도 빨대에 머금은 물과 먹물의 양을 잘 조절하면 다양한 풍선 모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먹그림들은 디자인 요소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겠죠.
3. 수세미
최근엔 다양하고 예쁜 수세미가 많이 만들어져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초록수세미를 찾아보기 어려워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초록수세미를 벼루 닦을 때 사용하곤 하는데, 그렇게 사용하다 남은 수세미들을 크기 별로 잘라 글씨를 쓸 때도 있습니다. 아래 ‘수세미’라는 글자는 수세미를 반으로 접어 먹물을 묻히고 사선으로 속도를 내면서 써본 것입니다. 의외로 강력한 느낌의 이미지로 표현되었죠. 꼭 이런 방법만 있는 건 아닙니다. 수세미로 쓰면 항상 이런 느낌만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면봉처럼 찍어서 표현했을 때는 또 다른 느낌을 낼 수 있고 먹물 양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수세미’ 글자를 표현했던 방법으로 ‘달리기’를 써보았습니다. 글자와 표현 방법이 잘 어울려 보이네요. 위 ‘수세미’ 글씨보다 물을 더 많이 첨가하여 먹색이 조금 더 다양하게 보이도록 작업해보았습니다.
4. 펜촉
저는 알파벳 글자를 쓸 때 사용하는 만년필 펜촉들을 갖고 있는데, 영자 필기체를 사용할 때 보다 먹물을 이용할 때가 더 많습니다. 아래 첫 번째 ‘Calligraphy’ 글자는 두 펜촉 중에 얇은 펜촉을 이용해 A4 용지에 쓴 것인데요. 영어를 쓸 때 사용하는 펜촉이라 캘리그라피를 영어로 써보았습니다. A4 용지이기 때문에 번지지 않고 깔끔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아래는 넓은 펜촉을 이용하여 A4 용지에 써 본 것입니다. 먹물을 한번 묻혔기 때문에 ‘y’를 쓸 때쯤에는 먹물이 닳아 흐리게 표현되었습니다. 저는 먹물이 꼭 모두 균등한 톤으로 써지지 않고 점점 흐려지면서 먹색이 변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 아래 글자는 화선지에 얇은 펜촉을 이용해 써본 것인데요. 먹물은 A4 용지보다 화선지에 더 잘 번지기 때문에 털로 쓴 것과 같이 보송보송한 느낌으로 표현됩니다.
5. 나무젓가락
나무젓가락은 역시나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도구 중 하나입니다. 아래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나무젓가락은 여러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부러뜨린 것도 있고, 연필처럼 깎아서 사용하기도 하고, 한 쌍을 그대로 사용하기도하며, 한 개만 사용할 때도 있습니다.
위 그림은 깎아서 사용한 나무젓가락과 A4 용지를 활용해 쓴 글씨입니다. 번짐이 많지 않기 때문에 먹물이 많이 묻은 곳은 그대로 말라서 두껍게 표현되고 먹물이 떨어지게 되면 글자는 얇은 선으로 써집니다. 위 글씨를 보게 되면 ‘나’와 ‘캘’은 굵게 표현된 것처럼 글씨를 강조 할 때에는 한 글자를 쓸 때마다 먹물을 묻혀 글씨를 써야 합니다.
위 예시는 화선지 위에 나무젓가락을 이용해 글씨를 써본 것입니다. 화선지는 많이 번져 보이는데, ‘나무’ 부분이 가장 많이 번졌다는 것은 물이나 먹이 많이 묻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을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글씨가 까맣게 되지 않고 어느정도 글씨를 알아 볼 수 있게 작업 되었습니다.
6. 닭털붓
이 도구는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붓은 아니지만, 필방에서는 구입이 가능한 도구입니다. 아래 붓은 닭털로 만든 것인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서예붓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죠. 특히나 끝부분이 일반적인 붓처럼 모여있지 않고 닭이 푸드득 날아다니는 느낌처럼 뻗어 있습니다. 이 붓을 이용해 글씨를 써보면 어떻게 표현될까요?
위 그림은 털 끝이 잘 모아지지 않는 닭털붓을 최대한 모아서 써보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시작하는 부분은 동그랗게 모아서 시작하고 끝나는 획들은 그대로 갈라지는 결을 사용하였습니다. 글씨도 닭이 푸드득 날아가는 모습처럼 써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지금까지 여섯 도구를 활용하면 어떤 글자가 써지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위에 소개한 여섯 가지 도구를 활용해 쓸 때 그 방법을 다양하게 응용하면 열 가지든, 60가지든 다양한 느낌의 글자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새로운 글자들의 꼴을 만들어 가며 캘리그라피의 독창성을 찾길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컨셉이 담긴 캘리그라피 보다는 그냥 붓글씨로 써놓은 캘리그라피가 많이 보여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글꼴과 도구 연구를 통해 컨셉이 확실하고 용도에 맞는 캘리그라피가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다음 칼럼에서는 간단하게 그림을 그리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글씨와 그림의 조화로운 배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