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실 캘리그라피.1_손으로 마음을 쓰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
글. 왕은실 작가(캘리그라퍼)
캘리그라피
“캘리그라피가 뭐야?”
포스터, 책 표지, 포장, 광고 등 시각디자인 영역에서 캘리그라피가 많이 활용되고 있지만 위 질문을 자주 받곤 합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캘리그라피는 문방사우(文房四友)와 그 외 다양한 도구들을 이용해 컨셉트를 잡아 손으로 글자를 디자인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붓과 먹으로만 작업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먹과 붓을 이용해 글자들을 쓰고 만들지만 잉크, 물감, 나무젓가락, 칫솔, 색연필 등 다양한 도구와 소품을 이용하기도 하죠. 제가 최근에 진행한 광고와 표지, 포스터 작업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비너스 잡지 광고에 들어간 캘리그라피. 나무젓가락과 A4용지를 이용해 작업했다
한국수력원자력주식회사 사보 <수차와 원자로> 3월호. 그림은 동양화물감으로 판화지에 그렸고, 글씨는 세필을 사용해 동양화물감으로 썼다
(왼쪽) 삼성카메라 미러팝 광고 작업. 수채화 물감으로 스케치북에 세필을 이용하여 작업했다. (오른쪽) 삼성SDI 사보표지. 갖고 있던 드로잉북에 물감을 사용해 작업한 사례.
최종적으로 선택된 글씨와 그림만 본다면 결과물은 하나입니다. 하지만 시안을 만들 때 여러 시도를 하게 되는데요. 붓은 기본이고, 세필, 붓펜, 나무젓가락 등을 이용해 컨셉트에 맞게 보통 다섯 개 내외의 시안을 만들어 클라이언트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서예와 캘리그라피
캘리그라피 정의 다음에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캘리그라피와 서예의 차이’에 대한 것입니다. 시각디자인에 사용되는 캘리그라피와 서예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우선 서예는 서법을 통해 임서(臨書, 따라 쓰기)를 기본으로 오랫동안 공부하고 연구하여 작가로써 자신의 생각을 전시나 퍼포먼스 등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저도 서예를 공부하던 시절 많은 문헌을 참고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필자가 참고한 자료를 이용해 동일한 방식으로 공부하고 연습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자료를 이용한 더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길 바랍니다.
<봉셔>
한글서예는 크게 판본체(版本體), 궁체(宮體), 민체(民體) 등으로 나뉘고, 그 속에서 필사본, 궁체정자, 흘림, 진흘림 등과 같이 세분화되고 있습니다. 먼저 <봉셔>(봉서)는 왕과 왕후가 친척이나 암행어사와 같이 아래 사람에게 내리던 서간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봉셔>는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자료인데요. 보다시피 글씨와 글씨 사이에 흘려지는 선들이 아름다우면서 견고합니다. 제가 흘려 쓴 글씨를 자주 쓰게 된 계기도 어찌 보면 <봉셔>의 영향일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시절에 한글을 접하고 <봉셔>를 보자마자 푹 빠져버려 열심히 따라 쓰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문서예는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전서(篆書) 등 크게 네 가지로 나뉩니다. 각 분야별로 많은 작가들이 있고 비석을 탁본한 법첩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 중에서도 잘 알려진 작가와 작품으로는 왕희지의 <난정서>를 들 수 있습니다. <난정서>는 행서첩(行書帖)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활자체에 비교해 간단하게 설명하면, ‘해서’는 글자를 또박또박 쓴 서체를 말하고, 행서는 그것을 약간 흘려서 쓴 서체라고 보면 됩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난정서>는 왕희지가 유흥에 젖어 있을 때 썼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긴장해서 쓴 글씨보다 자연스러운 필체를 좋아해 왕희지의 <난정서>에 빠져 들었습니다.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와 <봉평비>(鳳坪碑)
<봉평비>의 정식 명칭은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입니다. 국보 제242호로 우리나라의 몇 개 되지 않는 보존 비석 중 하나죠. 이 글씨를 보면 알겠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정형적인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봉평비>는 부정형적이면서 순박한 글자 형태가 좋아 공부했던 비첩입니다. 이 외에도 좋아하는 우리나라 비석 중에 <광고태호태왕비>가 있는데, <봉평비>보다 정형적이면서 순박한 획의 질감을 보여줍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법첩들을 보고 서예를 공부했습니다. 이 외에도 더 많은 비첩들을 참고해 보고, 듣고, 쓰며 연습했죠. 임서, 즉 따라쓰기를 통한 공부 속에서 ‘나’만의 개성과 특징을 찾아 글씨를 다양하게 쓰고 싶다는 의지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캘리그라피에 빠르게 적응하고 발돋움 할 수 있었던 데에도 서예라는 기본 바탕이 있어 가능하지 않았나 짐작해 봅니다.
컨셉트와 도구
자, 이제 실무에 적용되는 이야기를 해볼까요. 캘리그라피는 나 자신의 느낌 보다는 의도한 이의 생각에 맞게 컨셉트를 표현하는 것이 우선시 됩니다. 글자를 보는 이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기준이 애매할 수도 있지만, 최대한 클라이언트의 의도에 맞추며 작가로서 표현한 글자디자인에 대한 의도와 표현을 서로 소통하면서 만들어가는 과정이 캘리그라피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바람이 분다’는 글자를 써달라는 의뢰를 받았다는 가정 하에 여러 도구를 활용해 시안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우선,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사용 범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포스터, 광고, 신문, 상품, 책 표지 디자인 등 글씨가 어디에 사용되는지 먼저 파악해야 하죠. 글씨는 전체 레이아웃 사이즈에 따른 구성과 이미지, 폰트의 배치에 따라 다르게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양한 조건들이 타이틀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큽니다. 글줄에 따른 표현과 강조되는 글자에 따라 표현되는 글씨의 이미지도 달라지죠.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컨셉트’라고 생각합니다. 가벼움, 무거움, 부드러움, 세련됨, 슬픔, 기쁨 등 어떤 컨셉트냐에 따라 글씨를 쓰는 도구와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나무젓가락, 만년필, 펜촉, 붓으로 표현된 각기 다른 느낌의 선
위에 예로 보여준 것보다 더 다양한 도구가 있지만 자주 사용하는 도구 중에 나무젓가락이 있습니다. 위 예에서는 일반적인 모양의 젓가락을 사용했지만 젓가락을 깎아서 쓰거나 부러뜨리기도 합니다. 털이 없는 젓가락은 자주 찍어 쓰고 특히 화선지에 쓸 때 처음에 많이 번지는 특징이 있어 먹물 조절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년필은 잉크를 담아 사용하는 반면, 펜촉은 잉크나 먹물을 찍어 쓰기 때문에 다른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이 도구들은 화선지 위에서는 많이 번져 의도치 않게 큰 점들이 많이 찍히기 때문에 A4 용지와 같은 종이에 사용하면 깔끔한 작업이 가능합니다. 화선지에는 많이 번질 수 있어 강약 표현에 효과적죠.
붓은 다양한 서체를 표현하기에 좋은 ‘털’을 갖고 있어 화선지와 가장 잘 맞습니다. 귀엽게,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발묵 효과를 활용해 다양한 먹색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도구들의 특징을 살펴 글씨를 쓰게 됩니다.
획을 짧게 표현하여 귀여운 느낌으로 쓴 글씨다. 개인적인 경험상 패키지디자인에 많이 썼던 글씨 형태이다
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듯 글씨도 흩날리듯 썼다. 이런 글씨 형태는 상품디자인처럼 가독성이 명확해야 하는 프로젝트 보다 영화, 콘서트, 뮤지컬 등에 사용하면 적당한 글씨 형태다. 광고카피에도 쓰일 법하지만 가독성 문제로 개인적인 포스터에 더 많이 사용했다
한 글자를 구성하고 있는 획 굵기의 대비를 크게 보여준 글씨다. 획 굵기를 달리해서 딱딱한 느낌이 덜하다
‘바’라는 글자의 ‘ㅏ’ 부분에 ‘-‘를 길게 늘어뜨려 바람이 부는 느낌을 표현했다. “바람”이라는 글자만 강조하고 나머지 글자들은 위 예시보다 조금 더 읽기 편하게 표현해 보았다
세로형태 예시. 가운데 중심이 아닌 오른쪽 중심으로 글씨를 썼다. 보는 이에 따라 조금씩 달라 보이겠지만 갈대가 연상되도록 작업했다. 오른쪽은 세로와 가로를 섞어서 쓴 구성이다. ‘바람’은 세로구성으로 쓰고 ‘분다’는 가로 형태로 표현해 보았다
위에서 보여준 사례는 디자인 범위에 따라 글씨를 얼마나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렇게 한 문장, 하나의 단어를 쓰더라도 컨셉트에 따라 도구에서부터 구성까지 온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써 놓은 글자를 세로 형태를 가로로 조합한다든지 여기저기에서 한 글자씩 조합해 짜깁기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렇게 첫 번째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듣고, 보는 것들을 캘리그라피로 표현해 직접 쓰고 컴퓨터에 옮기는 방법 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