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타이포 기행 – London Typography tour.1
글. 김창식 Chang Sik Kim (그래픽디자이너, 미국 산호세대 그래픽디자인학과 학과장)
#1 영국 타이포그래피 기행 London Typography Tour ①
2011년 6월 7일, 오랜만에 화창하고 푸른 샌프란시스코 하늘 위로 날아올라 미대륙을 가로지르며 그렇게 대서양을 넘어 유럽을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호기심 어린 학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3년 만에 다시 찾는 유럽… 첫 번째 목적지는 런던이었다. 첫 일주일은 현대 타이포그래피 매거진의 진수인 Baseline Magazine, 글꼴 디자인 교육의 메카인 University of Reading, 그리고 최근에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폰트전문 제작회사 중 하나인 Dalton Maag Font Foundry를 방문하여 워크샵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영국 타이포그래피의 사적 고찰과 흐름, 그리고 글꼴디자인의 영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길 희망하였다.
워크샵 진행 중간엔 예술 문화 체험의 목적으로 British Museum, Design Museum, Victorian & Albert Museum, Science Museum, Tat Modern, RCA 등을 방문하였다. 늘 그러하듯이 여행지 도처에 생활 속에서의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의 발견은 항상 설레임을 동반한 즐거움이다.
공항 입국 심사장에서부터 대하는 다소 거센 브리티쉬 악센트가 미국 학생들에겐 오히려 묘한 뉘앙스로 다가오며 그렇게 런던에서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300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역사의 미국은 다국적 이민자들의 사회구조 속에서 의례적으로 자신을 스스로 세계의 리더라고 자부하는 공교육을 하여왔다. 그렇게 성장해 온 젊은 대학생들에 미국 타이포그래피의 원류를 찾아 유럽을 살펴본다는 설렘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에 색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5천년 역사의 배경을 가진 한국인 교수로서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하는 미국인들에겐 유럽 문화에 대한 자격지심 같은 것이 기본적으로 잠재해 있음을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터라 이번 여행은 학생들에겐 더욱더 의미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2000년과 2006년에 영국을 방문했을 때보다도 이번 여행 중에 런던은 상당히 그 원류적 힘이 차츰 퇴색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왠지 모르게 받았다. 왜일까? 글로벌 시대가 눈에 보이거나 잠재해 있는 문화를 희석했을 탓일까? 아니면 경제 침체의 파도에 넘실대며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탓일까? 그것도 아니면 전 세계가 하나가 된 가상현실의 공 간에서 사는 우리 모두의 무국적 이미지의 단편적인 현상이 초래한 결과인가? 하여튼 이제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그 나라만이 가진 유일무이한 예술정신과 스타일이 딱히 뭐라고 정의하거나 쉽게 찾아 보기란 여간 어려운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도 세월의 무게 속에 겹겹이 쌓여있는 그 견고한 문화의 후광을 오늘날 우리가 알게 모르게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과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의 무한한 잠재력이 내재해 있다고 확신하면서 이제 영국 타이포그래피 기행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 영국 하면 누구에게나 항상 떠올려지는 이미지들이 있다. 빨간색 2층 버스와 공중전화부스, 그리고 영국황실을 모티브로 각종 국가기업을 중심으로 한 브랜드가 그것이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아직도 런던 시내에선 초기 디자인의 공중전화부스가 최근 리디자인 된 것과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2층 버스도 여러가지 디자인으로 발전되어 오고 있다.
▲ Royal Mail은 그 이름과 소재에서 풍기는 고풍스러운 이미지를 드러내고자 간략하고 강렬한 컨셉트와 색상으로 디자인되었다. 오른쪽 애플리케이션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떻게 장식적인 모티브가 이렇게 간결한 레이아웃에 적용되어 커뮤니케이션을 극대화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우리의 우체국 사인이나 그래픽 모티브와 사뭇 비교된다.
▲ 위의 사진들은 최근 런던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고물 중에 이동통신 서비스회사인 Vodafone의 지점과 택시와 전철 등 교통수단에 적용된 그래픽(영국 국기와 타이포그래피를 잘 활용한 광고)과 로고이다. 우측하단의 사진은 BBH London 광고 대행사가 제작한 모바일 인터넷 서비스를 알리는 광고물로 유명한 런던 서브웨이 노선도의 시각적 특성을 연상시키는 컨셉이다.
▲ 우리의 삶과 생활 속에 자리하고 있는 각종 환경 타이포그래피의 예들. 문자는 우리의 말과 생각과 소통을 위하여 그렇게 늘 우리 곁에 존재해 왔고 사람들은 이러한 기호를 통한 논리적인 놀이와 상호교류를 즐겨왔으며 나아가 역사의 중 심에 기록으로 남아 후세에게 선조의 영광을 찬미하여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자극하는 매개물로 살아 숨 쉰다. 그래서 우리는 타이포그래피에 그렇게 열광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 위의 사진은 Tat Modern gallery 내부의 전시장으로 진입하는 공간의 타이포그래피로, 설치 작업과 에스컬레이터에 방향을 지시하는 정보이며 동시에 장식적인 그래픽 모티브로서의 타이포그래피 적용 예이다. 좌측 아래의 사진은 지하 전시장과 갤러리 스토어로 연결되는 부분에 위치한 미술관련 교육 세미나실의 전경이다. 알파벳을 이용한 흥미로운 벽면 구성이 돋보인다.
▲ Victorian & Albert Museum 내부 전경 고전과 현대의 조화가 돋보이는 박물관으로 다방면에 흥미로운 특별 전시가 매월 기획된다. 우측 하단의 사진은 건축관련 전시에 디스플레이 되었던 다이컷으로 구성된 건축 서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기존의 pop up book이 갖고 있는 도형의 입체화에 그치지 않고 타이포그래피와 각 펼침 페이지, 그리고 건축물 드로잉이 한데 어울려서 마치 거대한 도심의 파노라마 모형도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이번에 영국 (특별히 런던)을 기행하며 “영국 타이포그래피”에 대하여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때 먼저 떠오른 것이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와 연계된 “중세 납활자와 인쇄술”, 그리고 서체디자인의 대중화가 발전 되었는가? 였다. 나아가 18세기 빅토리안 미술의”공예운동”(나중에 근대 디자인의 모태가 되는)에 미친 영향과 19세기 말 산업혁명의 태동과 그 후 폭풍인 1, 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되짚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본 칼럼의 성격에 기초하여 영국의 근현대 서체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 역사를 간략히 되짚어 보자. 아는 바와 같이 15세기 전까지는 주로 커뮤니케이션과 기록의 수단으로 이른바 필사본 (manuscript; 거의 글을 그린다는 개념에 가까운 수작업 출판)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15 세기에 이르러서야 납활자를 조판해 재활용할 수 있는 기계화 복제 시스템이 가능해 졌다.
▲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타이포그래퍼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Wim Crouwel의 작품을 총망라한 대형 전시 “a graphic odyssey”가 지난 6월 런던 여행 중 London design museum에서 있었다. 윗줄의 사진은 전시장 내부 전경과 포스터이다. 아래는 그의 디자인 스타일과 철학을 잘 드러내는 전시 엠블렘이며 우측은 이른바, new typography로 명명된 미래주의적 서체 구조를 가진 그의 유명한 디자인이다. 이 작품은 후에 세계 각국의 디자이너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우리나라에서도 그 영향을 받은 글꼴들이 만들어졌다.
▲ 좌측의 위로부터 Baskerville, Caslon, Didot, Gill Sans, 그리고 Matthew Carter가 리디자인 한 Big Caslon 서체이다. 획과 카운터 스페이스 그리고 중심축의 각도가 변화되어온 이른바 과도기적 현상을 살펴볼 수 있다. 오른쪽 사진은 런던 시내 한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체와 애플리케이션이다.
▲ Caslon체의 서체 견본과 Chiswell Street에 있던 활자공방의 내부 모습
평소에 책 출판에 관심이 많았던 영국인 William Caxton은 15세기 말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자료를 수집하고 급기야 영국 Westminster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인쇄소를 설립하고 출판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래픽 디자인 역사의 중심에 서기에는 다소 전문성이 부족했던 타입세터이자 출판인이었지만, 근대 영국 타이포그래피와 인쇄분야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Incunabula (1450s to 1500년)로 불리는 기간 동안은 아직도 필사본(manuscript)이 서적출판에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납활자를 이용한 근대 타이포그래피 시대로 접어들면서 William Caxton은 이른바 colophon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만들어 냈다. 인쇄소와 출판 제작 관련 정보를 기록하는 섹션: 인쇄소 정보, 인쇄공 이름, 사용 활자, 종이, 인쇄, 제본방식 이외에 책 내용이 아닌 출판 프로덕션에 관한 저작권에 대한 보호를 위한 방식으로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최근에 거의 모든 서적에 뒷부분에 찾아볼 수 있는 하나의 포맷이 되었다.
Incunabula 시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colophon 구조는 책의 서두에 등장하는 half title(나중에 title page로 확장되는)에 그 일부 기능(저자 및 출판사의 이름 등)이 옮겨져 왔다. 흥미로운 것은 필사본 시대까지만 해도 책의 저자에 대한 정보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8세기 초엽(1734)에 마침내 글자 구성과 활용에 관한 가이드라인이 되는 최초의 근대적 개념의 type-specimen이 등장하게 되는데, Garamond style의 Aldine roman 서체를 근간으로 좀 더 다듬은 서체(Caslon)를 만든 William Caslon이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이 서체는 절도 있는 느낌의 클래식 스타일이며 약간의 가늘고 굵은 획들 간의 대조가 돋보이는 글꼴이었다. 나중에 Caslon체는 Benjamin Franklin을 통하여 미국에 소개되었고 Baltimore 에 있는 인쇄소를 동하여 공식적으로 미국독립선언문(United States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의 복제본을 만드는데 사용되면서 대중적인 글꼴이 되기도 하였다.
▲ Baskerville체의 서체 견본과 미국독립선언문, 그리고 글꼴의 작도법
18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 Birmingham에 살던 캘리그라퍼 John Baskerville도 Caslon을 근간으로 미적인 아름다움을 더 강조한 서체를 개발하였다. 이전까지의 serif roman type에서 볼 수 없었던 좀 더 글꼴의 닫힌 공간(counter)과 곡선부분을 확장시켰으며, italic의 경우, 판독성을 높여 읽기 빠르고 정확하면서도 심미적인 만족감을 높이는데 주안점을 두고 제작하였다. Baskerville의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일컬어’과도기적 서체 (transitional)’라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자간과 책 페이지의 마진마저도 더 확장시키는 시도를 통하여 서적 디자인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 William Morris의 초상과 그의 서체로 조판된 서적내지
한편 1884년 독일에 Ottmar Mergenthaler에 의하여 발명된 Linotype 활자 조판기계와 1887년 미국의Tolbert Lanston가 발명한 Monotype 기계는 20세기 현대 타이포그래피와 출판 분야의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사이에 영국에 서는 이른바 미술공예운동 (Arts and Crafts Movement )로 일컬어지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중심에 William Morris가 있었다. 지금도 빅토리아 알버트 뮤지엄 1층에 있는 카페테리아는 Morris가 만들어 놓은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는 방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의 예술 혼을 느낄 수 있다. 이 시기에 인류사의 일대 변혁인 산업혁명 (Industrial Revolution)이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이전까지 수공예 시대에 살던 많은 평민들 중에는 서적의 보급 그리고 교육의 문제로 문맹인율이 높았으나, 기계화 혁명 후에 더욱 더 효과적인 문자조판과 인쇄 그리고 출판의 다양화와 경제적 대량 생산의 메카니즘으로 말미암아 큰 혜택을 받았으며, 곧 출판언론 대중화에 기여를 하였고, 급기야 더욱 더 다양한 타이포그래피의 발전의 필연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John Ruskin과 사회주의자였던 William Morris은 이른바 Romantic Gothicism을 근본 정신으로 인간이 노동미학의 극 치인 장인정신에 의거한 공예술을 찬미하는 ‘미술공예운동’을 주창하며 장식 미술의 극치를 재현하고자 하였다. 작가이자 예술가였던 Morris는 자신의 출판물에 만족하지 못해서 급기야 인쇄공인 Emery Walker에게 중세시대 아름다운 캘리그라피를 기반으로 한 활자를 만들 것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Kelmscott Press라는 인쇄소를 설립하고 Morris는 Walker와 함께 세가지 활자체를 개발하였는데 Nicolas Jenson과 다른 두 개의 독일 Gothic체를 원형으로 만들었다. 모두 수공으로 제작 하였으며 특히 이니셜과 각종 문양들은 목활자와 목판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제작되었다.
Kelmscott Press에서1896년에 출간한 책인 Chaucer은 독일의 출판물 디자인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이른바 보고 즐기는 감상용 책으로서의 전형을 보여준다. 후에 이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영국출판사가 Doves와 Ashendene presses이다. 1900년에 창립된 Doves press는 T.J. Cobden-Sanderson와 Emery Walker에 의해 아르누보 스타일의 장식미학과 간결하고 완벽한 공예미의 조화를 이루어낸 성공적인 예이다. 20세기 초반에 더욱 더 기계화 산업화가 가속되는 와중에 출판 분야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글꼴 (Caslon)을 기초로 한 대량 생산용 활자가 대중적으로 주조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더불어 독일을 중심으로 sans serif체가 세상에 선보이게 되었다. 미술과 문학 전반에 새로운 사조(다다이즘, 미래파, 큐비즘, 구성주의 등)가 등장하면서 전통적인 타이포그래피와 실험적인 타이포그래피의 혼재가 거듭되었고 이는 서로 반발과 융합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통하여 여러 갈래로 발전되어 갔다.